난삽하게 가까운 시선 대신 조금 떨어져 오히려 명징한 시선으로...
손홍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나는 진실을 알아. 내 가슴에는 진실이 있어. 내 가슴 속에 진실이 있다는 건 내 가슴이야말로....... 진실을 은폐한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p.81)
나도 이런 이야기를 꿈 꾸어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가는 그런 이야기였다. 여자와 남자가 이제 막 헤어지는 장면에서 시작되어 남자와 여자가 방금 만나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실현되지 못한 꿈을 소설에서 확인한 것 같다. 어둡고 비뚤어진 끄트머리와 전 과정을 통과하는 은폐된 진실은 어쩌면 그 시작점에서 발견되는 달디 단 밥상을 통하여 폭발한다.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 시작에 가까이 가고 나서야...
“... 얼굴을 붉히거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괜히 울고 싶어졌고 그런 심정을 행여 들킬세라 고개를 숙인 채 아직 아내는 아니었지만 아내가 될 게 분명하며 아내일 수밖에 없고 과거에도 미래에도 어쩌면 전생에도 다음 생에도 아내일 것 같고 아내여야만 하는 아내가 차려준 최초의 밥상을 말없이 달게 먹었다...” (p.110)
손홍규 「정읍에서 울다」
“... 그는 솔밭으로 들어가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잊었던 일들, 잊었다고 믿었던 일들, 잊을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들이닥쳤다. 산 자식보다 죽은 자식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줄은 알았다. 그는 한 번도 아름다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선량했던 적도 순수했던 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했던 것만 같았다. 목숨이 하늘과 같이 가지런하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고요하고 차갑고 가벼운 밤이었다...” (p.135) 문장에 연이어 그 밤, 늙은 남편은 치매에 걸려 걸핏하면 집을 나서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는 아내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업은 남편과 업힌 아내가 나누는 대화가 압권이다. “여보, 임자..... 말 안해도 알지? / 말 안 하면 모르오. / 말 안해도 아는 걸로 믿겠네. / 맘대로 하시오.” (p.136)
구병모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이네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 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p.192) 아이를 임산한 몸으로 남편 이완의 시골 부임에 따라 나선 정주, 정주가 그곳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이물감,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과는 또 결이 다르던 가장 큰 이물의 인상을 지녔던 슈퍼 남자라는 존재의 반전이 있다.
방현희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
“... 미친 녀석을 받아주는 공간은 작은 차체 하나 만큼일 뿐인 게다. 그 차체 하나로 뚫고 가는 외길 만큼이었을 테다. 친구는 그 작은 차체로 뚫고 가는 길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들으려 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미친다는 건 그런 거니까. 고장 나는 곳이 또 고장이 나면 그 차는 버려야 하는 것이지. 그러나 녀석은 고장 난 곳이 매번 다시 고장 난다는 것을 모르는 척했지. 미친다는 건 그렇게 남김없이 탕진하는 거니까...” (p.225) 아버지의 트럭 그리고 친구의 포르쉐,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차종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아버지와 친구의 삶 또한 천양지차이지만, 그들이 똑같이 미쳤다는 것만큼은 그리고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만큼은 공유되고 있는...
정지아 「존재의 증명」
“... 취향은 돈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품격이 취향을 결정한다. 아니, 전제와 결론이 바뀌는 편이 더 진실에 가깝다. 취향이 사람의 품격을 결정한다. 취향이 곧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p.250)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의 기억을 잃은 채 카페에 앉은 채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이다. 이디오피아 하라 커피, 발퀴레 로씨의 브랙 스트라이프 찻잔, 토넷 No. 14 의자, 로스 러브그로브가 디자인한 코스믹 리프 세레이즈의 엘이디,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찰스 고스트의 크리스털 모델 스몰 사이즈 스툴과 같은 취향이 잃어버린 기억을 뚫고도 솟아오르는...
정찬 「새의 시선」
1986년 4월 28일에 발생한 서울대 김세진 열사와 이재호 열사의 분신 사망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토대로 하여 2008년에 발표된 김응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과거는 낯선 나라다>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정찬의 단편 소설 <새의 시선>이 있다. “... 그는 오늘도 나타났다. 의사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의 기척을 느꼈다. 애써 모른 척한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가 반가우면서도 두렵다. 왜 두려운가? 새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이다. 새의 시선은 사물과 풍경을 꿰뚫는다. 그 투명한 시선이 나를 환히 드러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p.287)
조해진 「파종하는 밤」
“... 씨앗의 씨앗이란 꽃을 피우게 하는 나무의 호르몬 같은 거라고, 어떤 나무들은 꼭 이 시간에 씨앗의 씨앗을 내뿜는다고도 했다. 씨앗의 씨앗이란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고 호르몬 같은 게 눈에 보일 리 없는데도, 나는 그의 말을 이심할 수 없었다. 입자, 아니 씨앗의 씨앗이 나타나면서 어둠의 가운데서부터 희붐한 빛이 흘러나왔고 생명이 배태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p.306) 왼팔 청년에게 들은 이야기 끝에 나는 공장의 나무를 떠올린다. 그 공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스러져간 어린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기록을 담아내는 예술 작업을 했던 내게는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어린 준희가 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지, 나의 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엄연한 것인지... 어쩌면 어린 준희는 알아서 잘만 살고 있고, 왼팔 청년은 사리가 분명하기만 한데...
손홍규, 구병모, 방현희, 정지아, 정찬, 조해진 /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 315쪽 / 2018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