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막 파문이 멈춘 물 위로 손가락 끝을 콕 찌르듯이...

by 우주에부는바람

산문집이라기엔 시적이다. 물론 시가 되기 위해서는 몇 장의 거름종이가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책은 그렇게 시와 산문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시인의 메모 노트라고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들어서며, 에서 시인도 그렇게 말하였다. 아직 정제되지 않은 생각의 알맹이를 엿볼 수 있다. 급하게 들어선 어떤 생각을 시인은 놓치지 않기 위하여 애쓴다. 그 손맛은 활력이라기보다는 전율에 가까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의 살인은 자연사이고 권력의 살인은 재난사이다. 개인보다는 권력이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 그리고 신은 모든 사람을 죽인다.

법이 권력의 흉기인 것처럼 시간은 신의 흉기이다.“ (p.49)


궁금한 것은 시인이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을 것이냐 하는 거다. 그는 방금 들어선 생각을 붙들고, 그 생각과 더불어 붙들린 시어들을 들여다볼 것인데, 시를 향하여 더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제 그만 시로부터 놓아 주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순간의 시인이 궁금하다. 생각 앞에서 홀로, 우두커니, 우주의 미아라도 된 것처럼 텅 빈 채로이던 그 순간...


“숲에서 나무들은 학생 같다.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는 것처럼, 같은 시간에 잎을 피우고 같은 시간에 잎을 떨군다. 그러나 모두 다른 방향으로 피어나고 떨어진다. 다른 사람의 눈빛 속에 다른 빛깔로 살아 있다.” (p.64)


어쩌면 그는 그럴 때 생각의 나무의 둥치를 부여잡고, 흔들릴 리 없는 나무대신 제 몸을 흔들 수도 있겠다 싶다. 나무가 떨구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기 자신이 떨구고야 마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마는 시인을 상상한다. 사육당한 사유가 아니라 사유가 그를 사육하고 말았구나, 체념의 순간을 떠올린다. 그 체념의 순간이 되어서야 퍼뜩 나무가 떨어뜨린 무언가를 수습하는 저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늙어버린 사람의 젊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아직 젊은 사람이 늙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전자의 대상은 언제나 ‘나’이고 후자의 대상은 언제나 ‘너’이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내 젊음’과 ‘네 늙음’을 사랑한다.” (p.113)


책에는 시라는 형태로 수습되지 않은 것들이 시라는 형태로 수습된 것들과 함께 있다. 흩어져 있고, 흩어진 채로 모여 있다. 이런 책을 읽는 것은 그러니까 이제 막 파문이 멈춘 물 위에 손가락 끝을 콕 찌르는 행위에 가깝다. 새롭게 생긴 파문은 그러니까 물의 소유일 수도 있고, 손가락의 소유일 수도 있다. 사실 손가락의 소유일 때도 그것의 진짜 주인은 결국 물인데, 사실 물은 그것을 모르거나 아는 체 하지 않는다.


“모든 발자국에는 세상의 끝이 찍혀 있다. 자신이 남긴 발자국의 넓이를 합하여 다음 생에 가질 땅의 크기가 결정된다 해도 나의 땅은 붉은 모래가 석양을 빨아먹는 황무지일 것이다. 나의 발자국은 꼭 나를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정작 신발은 가보지 않은 곳 때문에 낡아간다.


우리가 하지 못한 일 때문에 늙어가듯이......“ (p.200)


여러 개의 문장들은 버리고 몇 개의 문장은 버리지 못한다. 내가 나를 나설 때마다 짊어지는 커다란 가방에 공간이 생겼다. 길게 늘어져있던 어깨끈을 바투 챙긴다. 그것이 나와 시인 사이의 거리를 얼마간 좁힐 수 있을 것처럼 군다. 아직 나를 출발하지도 못하였는데 실컷 방황한 사람처럼 낡은 가방을 바라본다.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방에 멱살을 잡힌 것처럼 나는 답답하다.



신용목 /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 난다 / 319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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