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A가 X에게》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와 진실된 주장의 메시지가 아름답게 하나의 영혼으로.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은 옛 교도소 73호 감방에 있는 사비에르에게, 그의 연인인 아이다가 보냈거나 보내지 않은 편지 세 뭉치로 이루어져 있다. 이 편지는 바로 옛 교도소 73호 감방의 마지막 수감자였던 사비에르가 만든 수납 칸에서 발견되었다. 존 버거가 어떻게 그 편지를 입수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아이다의 보내지 않은 편지까지 소설에 실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설은 사비에르 그리고 아이다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어설픈 구석이 있다. 그래서 그 적용을 놓고 논쟁과 문제 제기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실천이 법의 어설픔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한다... 부의를 합법화하는 악법들이 있다. 그런 법은 어설프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법들이 적용되면 그 법들이 강요하려는 바로 그것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법들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무시하고,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물론, 동지여, 그런 법들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어설프다!” (p.39)


사비에르는 이중종신형을 선고 받고 갇힌 몸이다.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니 살아서 교도소를 나올 방도가 없다. 아이다는 면회조차 갈 수 없다. 두 사람은 연인일 뿐 법적인 부부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이다는 당국에 자신과 사비에르의 결혼을 요청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있다. 아이다는 편지를 비롯해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비에르에게 보낸다. 사비에르가 아이다에게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쉽지는 않은 과정을 거치는 듯하고, 소설에 그 편지들이 실려 있지는 않다.


“희망과 기대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처음에는 그저 지속되는 시간에서만 차이가 있는 줄 알았죠. 희망이 좀더 멀리 있는 일을 기다리는 거라고 말이에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게 차이점이랍니다. 그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지만 각자 꾸는 꿈은 달라요. 내가 알게 된 건 그 뿐이 아니에요. 몸이 하는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그들이 당신에게 이중종신형을 선고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은 믿지 않게 되었어요.” (pp.40~41)


대신 우리는 사비에르의 메모들을 확인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 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비에르는 지금 여기의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명민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거대하게 일원화되어 있는 돈과 권력의 세계를 향하여 그가 표출하는 일갈들은 너무 적확하여 후련하다. 이 지혜로운 적의로 가득한 메모는 아이다의 로맨틱한 편지 뒷면에 실려 있다.


“사실을 말해 줄까? 단어들이 괴롭힘을 당한 나머지 정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민주주의, 자유, 진보 같은 단어들은 그들만의 독방으로 돌아가면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다른 단어들도 있다. 받아들여지지 않던 제국주의, 자본주의, 노예제 같은 단어들이, 거의 모든 경계면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고, 이전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세계화, 자유시장, 자연법칙 같은 사기꾼들이 활개를 친다.

해결책: 가난한 자들의 저녁 대화. 거기에서라면 일말의 진실이 말해지고 지켜질 수 있다.“ (p.70)

“하늘을 보기 위해 침대 위에 올라간다. 하늘을 보면 내가 잠시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금융 투기의 대상이 되는 사모펀드의 총액은 전 세계 국가들의 국민총생산을 모두 합한 것보다 스무 배나 크다!” (p.161)

“가난한 자들의 전체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측정 불가능하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있고,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고 해도 그들과 관련이 있다. 그 결과 부자들이 하는 일은 담을 쌓는 일이다. 콘크리트 벽, 전자 감시, 미사일 폭격, 지뢰밭, 무장 대치, 미디어의 잘못된 정보 등이 만들어내는 벽,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융 투기와 생산 사이를 가르는 돈의 벽. 금융 투기 및 거래의 단 삼 퍼센트만이 생산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사랑해.” (p.171)


사비에르의 바깥쪽, 아이다의 일상 또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특히 그녀가 부치지 못한 편지에는 그녀를 둘러싼 상황 또한 아이다의 바깥쪽, 사비에르의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녹녹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때때로 그녀는 이런 사실을 그에게 알리기를 주저한 것만 같다. 대신 아이다는 편지의 많은 부분을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는 데에 주력한다. 그것이 더욱 가슴 아픈 사랑의 흔적이 되기도 한다.


“당신의 편지를 자주 다시 읽어 봐요. 밤에는 안 읽죠. 밤에는 그 편지들을 다시 읽는 게 위험할 수 있거든요.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일하러 가기 전에 그것들을 읽어 봐요... 그렇게 읽는 동안, 사이의 날들이 기차의 화물칸처럼 툭툭 끊어진 채 스쳐 가요! 사이의 날들이 무슨 의미냐고요? 지금 읽고 있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와 지금 사이죠. 그리고 당신이 그 편지를 썼던 날과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날 사이이기도 해요. 또 교도관들 중 누군가가 그걸 부쳤던 날과 내가 지붕 위에 앉아 그걸 읽고 있는 날 사이이고, 우리가 모든 것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런 날과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 다음 그것들을 잊어버려도 되는 날 사이예요. 그날들이 바로, 내 사랑, 사이의 날들이고,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선로는 이백 킬리미터 떨어져 있죠.” (pp.207~208)


소설이 품고 있는 함의는 물론이려니와 문장도 전체적인 구성도 훌륭하다. 아이다가 보내는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와 사비에르가 토해내는 진실된 주장의 메시지는 편지지의 앞면과 뒷면에서 제 구실을 한다. 그것들은 서로를 비껴가거나 모른 체 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나의 몸이 되고 아름답게 하나의 영혼이 된다. 깊은 사유가 체화되어 열렬하게 튀어 나오니, 소설이라는 외투조차 거추장스러워 보인다.



존 버거 John Berger / 김현우 역 / A가 X에게 (From A to X, A Story in Letters) / 열화당 / 231쪽 / 200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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