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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단시엘 W. 모니즈 《우유, 피, 열》

엄마에서 딸에게로 혹은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이어지는...

  “어디에나 여자들이 있었다. 할머니의 친구들이며 옆 동네에서 온 낯선 여자들은 물론 더 멀리서 온 여자들도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자들도 있었고, 서류 정리를 하는 여자들도 있었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사업하는 여자들도 있었고 매춘하는 여자들도 있었으며, 결혼을 했던 여자들도, 한 번도 결혼한 적 없는 여자들도 있었다. 꽃을 단 여자들도, 풀잎 치마를 입은 여자들도, 머리를 땋은 여자들도, 구슬을 단 여자들도, 벌거벗은 여자들도 있었다. 늙은 여자들, 어린 여자들, 키 큰 여자들, 부둥켜안고 노래하고 달리고 기도하는 여자들과 밤새 술을 마시는 여자들.” (pp.323~324, 〈뼈들의 연감〉 중)


  「우유, 피, 열」

  “엄마는 수건을 한 장 집어 들고 에바를 일으켜 세워 물기를 닦아주고는 생리대 사용법을 알려준 뒤 거실로 데리고 나간다. 딸을 다리 사이에 앉히고 엉킨 머리를 빗겨주고 두피에 오일을 발라 확신에 찬 손가락으로 마사지를 해준다. 머리를 땋아 왕관처럼 둘러주는 동안 에바가 실컷 울도록 내내 말없이 내버려둔다. 에바는 이 새로운 감정, 감각이 갈라져 열리는 느낌이 놀랍다. 자그마하면서도 대단한 일이 내면에서 일어나며 공간을 만드는 중인 것 같다.” (p.37) 책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의 주요 인물들은 여성이고, 그들에게 벌어지는 일 혹은 그들이 벌이는 일들은 끈적하게 현실적이다. 어린 소녀 에바와 그 친구인 키라 또한 그 여성들 중 한 명이다. 소설을 읽다가 아내와 함께 놀러 간 스카이베이 호텔의 방이 생각났다. 가장자리 방이었고 발코니가 길었는데, 나는 아내가 그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아내가 그곳에서 발코니 바깥으로 휙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었는데, 소설의 어느 순간 그때처럼 숨이 턱 막혀버렸다.


  「향연」

  거의 다 자란 아이를 사산하여야 했던 내가 겪는 극심한 불안증이 중심에 있다. 그로 인하여 남편인 히스와 전처 소생의 딸 닐스가 겪게 되는 일상의 흔들림은 그 주변부에 있고.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후자를 중심에 놓거나 혹은 이 전자와 후자 사이의 타협에 소실점을 맞추었을 것이나 〈향연〉은 더더욱 전자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가의 구별되는 특징이다.


  「허들」

  소설들에는 성적으로 미숙하거나 이제 곧 미숙의 허들을 건너 뛰게 되는 나이 즈음의 소녀들이 자주 등장한다. 〈허들〉의 제이 또한 그러한 연령대에 있고, 그 주변의 목사 그리고 동생을 괴롭히는 어린 사내가 있다.


  「천국을 잃다」

  암의 재발로 집을 떠난 글로리아가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글로리아를 떠나 보낸 전과 후의 프레드가 주인공이라고 해야 할까. “... 그는 벗은 옷들을 현관에 그대로 던져둔 뒤 손에 쥔 핀을 이리저리 굴리며 컴컴한 방마다 들어가 서성거렸다. 그가 벌거벗은 상태라는 사실이 복도에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침실에 들어가니 활짝 열린 벽장에는 글로리아의 블라우스들과 글로리아가 가장 좋아하던 신발들은 없고 안에서 흘러나온 한층 더 순전한 어둠만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프레드는 다가가 벽장을 닫았고, 거울 앞을 지나칠 때는 결코 쳐다보지 않았다.” (pp.123~124) 그건 그렇고 소설을 읽으며 이게 최선의 번역이었을까, 라는 의구심이 간혹 들었다. 예를 들어 ’그가 벌거벗은 상태라는 사실이...‘ 와 같은 부분들...


  「적들의 심장」

  때때로 모녀 사이에는 바리케이트가 생긴다. 엄마는 그렇지 않지만 딸에게 엄마는 때때로 적이 되는 순간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 바리케이트를 건너가거나 무력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엄마 측의 몫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소설 속 클라인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그 바리케이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 바리케이트가 무너지는 순간 그 사람은 모녀 공동의 적이 될 수도 있겠다.


  「배의 바깥에서」

  “나는 트위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모래가 다글다글한 길을 우리 넷이 뛰어 내려가는 동안 햇살은 우리 어깨 위로 미끄러져 내렸고 긴 다리들이 우리를 물가로 거침없이 데려갔다. 가끔씩 무료 콘서트가 열리는 풀이 무성한 야외관람석을 가로지르고 비닐 방수포와 버려진 천으로 만든 천막도 지나쳤는데 천막 아래에서 지내는 노숙자들이 잔돈을 요구하듯 손을 불쑥 내밀며 트위트에게 겁을 줬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그들을 지나쳤다. 그들의 손은 내게 닿을 수 없었다. 나는 깃발처럼 웃음을 휘날렸다.” (pp.181~182) 겂없이 튜브에서 뛰어내리는 바람에 죽음의 문턱을 밟아야했던 네 명의 소년 소녀들에 대한 묘사가 실감난다. 그들은 구조되었지만 그러한 사고의 전과 후는 크게 다를 것이다.


  「스노우」

  소설의 주인공들이 소녀 혹은 엄마라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플로리다 주 잭슨빌이라는 도시이다. 나와 데릭은 섹스를 한 지 한참되었고 데릭이 집에 있는 밤에 나는 일을 하기 위하여 술집을 향하고, 한바탕의 어수서한 밤과 새벽을 거친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을 발견한다. “... 안식하지 못하는 영혼들처럼 눈이 밤새도록 흩날렸는데, 눈송이가 워낙 고와서 그 차가움이 미처 그에게 닿기도 전에 녹아버릴 터였다. 나는 쓰레기봉지를 길가까지 끌어다놓고는 잠시 그대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남편은 어쩌면 달을, 얼어붙은 공기에 둘러싸인 그 보름달을 바라봤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찾고 있었을지도.” (p.219)


  「필요한 몸들」

  빌리는 임신 6주차에 접어든 사실을 확인하였지만 아직 낳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쉰 살을 맞이한 엄마 콜렉트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생인 바이올렛에게는 이 사실을 알렸지만 엄마 콜렉트에게는 아직이다. 자신을 갖게 되었을 때의 콜렉트 그리고 그 과정을 이제 막 시작하게 된 빌리 사이에는 어떤 긴장감이 있다.


  「물보다 진한」

  “... 나는 내가 몸을 일으켜 차 밖으로 나가 항아리를 여는 순간, 갑갑해서 나온 기침 따위에 가루가 풀썩 날리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아버지의 고운 뼛가루 속을 갈퀴질하며 헤집다 한 움큼 집어 내 혀 위에 올리면 티끌이 된 아버지에 닿는 내 근육이 움찔거리는 상상을, 내 이 틈새에 아직 아버지가 끼어 있을 때 항아리를 기울여 아버지를 흘려보내 다른 잠들지 못하는 것들과 함께 이 쓸쓸한 도로 위를 헤매게 만드는 상상을 한다.” (pp.295~296) 엄마의 요청에 따라 나와 오빠인 루카스는 아버지의 재가 담긴 항아리를 들고 여행길에 오른다. 하지만 중간에 루카스의 여자 친구인 셸비가 동행하고 차에 문제가 생기면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색다른 것들」

  “우리는 가입조차 못했을 거야. 가입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아버지들, 더 올라가서는 그들의 할아버지들로부터 부를 넘겨 받아 우리에게 건네주고 검은 육체와 갈색 육체의 삶과 죽음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한들 우리 가운데 이런 끔찍한 풍요에 가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 장소를 쓸고 닦을 뿐이었다.” (pp.299~300) 단편 소설이 아닌 여섯 페이지짜리 엽편 소설이다. 정찬 모임의 주인공들인 그들과 우리 사이에 성별이 놓여 있다, 라고 하면 맞는 해석이 될지 잘 모르겠다.


  「뼈들의 연감」

  “엄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만나면 내가 헬렌이라고 부르는 우리 엄마, 나는 엄마 이야기는 어느 누구와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든 하지 않든 어쨌든 헬렌은 내 엄마고, 헬렌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p.314) 두 살 짜리인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세상으로 나간, 정해 놓은 자신의 일정에 따라 가끔 나를 보러 들르는 헬렌은 일반적인 형상의 엄마는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엄마를 향한 내 마음의 모습은 꽤나 보편적인 것도 같다.



단시엘 W. 모니즈 Dantiel W. Moniz / 박경선 역 / 우유, 피, 열 (MILK BLOOD HEAT) / 모모 / 344쪽 / 20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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