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미스터리 탐정 소설의 외양을, 쉽사리 끓어오르지 않는 문장으로 냉정하게.

by 우주에부는바람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지금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영국의 사립 탐정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상하이 공동 조계 구역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라지고 이어 어머니 또한 사라진 다음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숙모의 손에 자랐다. 크리스토퍼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때때로 끄집어내고는 한다. 여장부 스타일이었으며 중국에서 아편이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던 어머니, 그리고 중국으로 아편을 들여오는 역할을 했던 회사에서 일하였던 아버지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막 부엌에 이른 순간 발소리가 나더니 어머니가 그곳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뒤로 종종 그때 내가 본 어머니의 얼굴을, 그때 어머니가 지었던 표정을 정확히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마 어떤 본능이 나로 하여금 그 표정을 보지 말라고 말했는지도 몰랐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은 마치 내가 다시 아주 어린애가 된 것처럼 내 눈앞에 선 어렴풋하고 커다란 어머니의 모습과, 어머니가 입은 연한 색의 여름용 드레스의 천뿐이다...” (pp.148~149)


장르를 가리지 않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미스터리 탐정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직업이 탐정이고 부모의 실종이라는 근원적인 사건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그 전개 방식에 스릴이 넘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서술의 방식은 시간의 진행과는 무관하고,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도 그러니까 부모님의 실종의 전과정이 드러난 다음의 통괘함 같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이삼주 동안에 걸쳐 세라와 여러 차례 가졌던 만남을 되짚어 보게 된 것은 간밤의 일이 있고 난 지금에 와서다. 그런데 쾌활하게 대답하던 중 살짝 덧붙이기라도 한 것 같은 그녀의 그 한마디에 자꾸만 생각이 미친다.” (p.232)


미스터리 탐정 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소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지금은 가까스로 기억해낼 수 있을 따름인 ‘이국의 땅’에서의 기억 정도에 그치고 있는 어린 시절을 향한,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는 자들을 향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크리스토퍼와 그가 젊은 시절 이후로 계속해서 조우해야 했던 여인 세라, 그리고 크리스토퍼가 입양한 소녀 제니퍼는 은밀하고도 직관적으로 연결된다.


“어린 시절은 지금 보면 아득히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요. 일본에 궁녀이면서 시인인 사람이 있었는데, 오래전 어린 시절이 얼마나 슬픈가에 관한 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이 우리가 자랐던 이국의 땅과 같은 것이라고 썼지요.” (pp.389~390)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적 배경 그러니까 세계대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시기, 그리고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야 했던 1900년대 초반 중국의 상하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가지고 있는 어수선함은 탐정 소설이라는 외양에 힘을 보탠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과 공간은 등장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순리와는 무관한 우여곡절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내 말은, 어머니가 나를 줄곧 사랑하셨다는 거야.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말이야. 그녀가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내가 좋은 삶을 누리는 거였어. 그 나머지 모든 것, 내가 어머니를 찾으려 노력했든, 이 세상을 파멸로부터 구하려 노력했든 어느 쪽이든 어머니께는 아무 차이가 없었던 거야. 나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그저 거기 있는 것으로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어. 그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나로서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렸어.” (pp.430~431)


소설은 작가 특유의 (불꽃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결코) 쉽사리 끓어오르지 않는 문장으로 냉정하게, 크리스토퍼가 겪었던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제목은 그가 고아였을 때, 가 아니라 ‘우리가 고아였을 때’, 이다. 그러니까 그가 아니라 우리, 사실 모든 이들의 어린 시절에는 (그리고 그 어린 시절을 품고 있는 나중까지) 그 당사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미스터리’ 하나쯤,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던가.



가즈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 / 김남주 역 / 우리가 고아였을 때 (When We Were Orphans) / 민음사 / 449쪽 / 20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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