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인간 아닌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낸 삶이 드러내보이는 인간에 대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어느 정도는 소설의 설정을 알고 있던 터라 놀라거나 갸우뚱거리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 헤일셤이라는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년과 소녀들이 드러내는 어떤 기운에서 느껴지는 모호함이나 섬뜩함 같은 것을 보게 되어도 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설정을 알지 못하였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이 십대 초반의 소년과 소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궁금하여 폭주하는 독서를 했을지 모른다.


“... 층계에서 그렇게 토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그 이후 몇 주에 걸쳐 벌어진 그 애의 문제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리라.” (p.28)

“.. 나는 그 애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 애는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알게 되었다.” (p.75)


그러고 보니 작가의 위와 같은 문장, 조금은 고리타분해 보이지만 이 작가가 사용하면 그런 촌스러움이 오히려 고풍스러운 미스터리의 일환으로 변환되는 문장은 그의 소설이 나름대로 대중적인 흡입력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당장 알려줄 마음이 없지만 독자는 곧 알게 되리라는 희망 같은 것을 품게 됨으로써,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일종의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된다.


“... 우리 각자가 일반인에게서 복제된 개체인 만큼 바깥세상에는 우리의 근원자가 살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의 근원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밖, 즉 시내나 쇼핑센터, 휴게소 같은 곳에 나가면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 자기나 친구들의 근원임직한 사람들, 곧 ‘근원자’를 찾아보곤 했다.” (pp.195~196)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누구든 자신의 근원자를 찾고 싶다면, 진짜 그 일을 해내고 싶다면 빈민가로, 쓰레기통으로, 화장실로 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곳들이 우리가 시작된 곳이니까요.” (pp.232~233)


그렇게 어느 시점에 우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캐시와 루스와 토미가 복제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계속 그러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입하기를 주저했고, 우리 또한 이미 그들이 복제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도 그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고 만다. 독자들은 마지막까지 그들의 기증자라는 역할, 때로는 간병사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기증자가 되고 마는 그들의 역할에 대해 소설 속의 ‘일반인’처럼 받아들이기 힘들다.


“... 나와 토미 사이에 뭔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루스와 나 사이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p.275)


캐시와 토미, 캐시와 루스, 루스와 토미가 헤일셤의 어린 시절부터 맺어온 관계, 코티지 시절의 노퍼크 여행에서 드러나는 일군의 감정, 그리고 간병사인 캐시가 기증자인 루스와 토미를 차례대로 만난 이후의 상황들은 너무 조밀하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 이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일종의 세밀화를 보는 것만 같다. 토미가 그려내는 이상한 그림처럼 이들의 관계는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그려지고 있다.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부끄러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 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p.386)


소설은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고, 우리는 <아일랜드> 혹은 그 이전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다. 설정 자체가 던지는 충격은 그러므로 이미 어느 정도 완충지대를 거쳐서 우리에게 도착했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다분히 문학적이어서 고루하지 않다.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인간 아닌 인간의 방식으로 살아낸 삶이 드러내 보이는 인간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므로...



가즈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 / 김남주 역 / 나를 보내지 마 (Never Let Me Go) / 민음사 / 399쪽 / 200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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