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과거를 돌아보지만 과거에는 지금이 고스란히 내포되어 있고...
최근에 읽은 작가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충격적으로 좋았다. 이전에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그만큼은 아니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은 것은 2015년 11월이었고, 그때는 박근혜의 교과서 국정화 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일본이 벌인 식민 전쟁과 마냥 무관한 것은 아닌 자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객관적으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소설을 모두 구매했다.
『"우리가 전쟁에 졌을 순 있다... 하지만 그게 적들의 방식을 원숭이처럼 따라 할 이유는 되지 않아. 우리가 전쟁에서 진 것은 총과 탱크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우리 민족이 어리석어서라든지, 우리 사회가 얄팍해서가 아니야. 넌 전혀 모른다, 시게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나나 엔도 박사 같은 사람이 말이다. 넌 글에서 그도 모욕했지.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조국을 생각했고 올바른 가치들이 보존되고 계승되도록 열심히 일했어.“
“그런 것들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오가타 상이 성실하지 않았다거나 일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전 단 한순간도 그런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오가타 상의 에너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낭비되었다는 겁니다. 사악한 방향으로 말입니다... 오가타 상, 스스로에게 정직해지십시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오가타 상도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오가타 상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할 순 없습니다. 당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꿰뚫어 본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들마저도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지요. 하지만 이제 그들은 풀려났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이끌고 있습니다.” (pp.192~193)』
《창백한 언덕 풍경》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은근히 겹친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오지와 《창백한 언덕 풍경》의 오가타 상의 생각이 닮아 있기도 하다. 그들은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들이 요구하는)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도 이러한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저기 말이에요, 에츠코. 난 전혀 부끄러울 게 없어요. 당신한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요...” (p.49)
작가는 이러한 아이러니, 그러니까 그저 본분에 충실하였을 뿐인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혼란스러움을 품위 있게 다룬다. 그들을 함부로 조롱하지 않는다. 물론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세상이 바뀌고 난 다음에 겪는 그들의 혼란을 조용히 보여줄 따름이다.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방식도 세 작품에서 공유되는 형식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지만 동시에 그 과거에는 현재가 내포되어 있다는 식이다.
“... 그로부터 몇 년 후 찾아온 또 다른 위기를 그가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면, 내가 나가사키를 떠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p.165)
그렇게 이번 소설의 주인공인, 현재 영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에츠코와 전쟁 직후의 나가사키에서 에츠코가 만난 의문이 여인 사치코는 자꾸 겹친다. 사치코의 딸 마리코와 에츠코의 자살한 딸 게이코도 마찬가지이다. 전쟁 후 일본에 들어온 미국인 프랭크를 따라 일본을 떠나려했던 것은 사치코였고, 사이코의 딸인 마리코를 생각하며 이주를 만류하는 듯하였던 것은 에츠코였는데, 막상 일본을 떠난 것은 에츠코라는 아이러니가 소설을 보자기처럼 감싸고 있다.
“... 골목 끝에 운하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거기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어요. 팔꿈치까지 물에 담근 채 말이에요. 아주 여윈 젊은 여자였어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다음 순간 말이에요. 에츠코, 그 여자가 몸을 돌리더니 마리코에게 씩 하고 웃어 보였어요.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마리코 역시 그랬던 모양이에요. 왜냐하면 그 애가 달리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거든요. 처음에 나는 그 여자가 장님인 줄 알았어요. 그래 보였어요. 그 여자의 눈빛은 실제로 텅 비어 있었어요. 그 여자는 두 팔을 물속에서 들어 올리더니 손에 든 걸 우리에게 보여 주었어요. 그건 아기였어요. 난 마리코의 손을 잡고 골목을 빠져나왔어요.” (p.97)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항구 소풍의 회상신을 보면서는 혹시 사치코는 에츠코의 분신이고, 마리코는 게이코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치코가 만났다고 믿었던 두 사람이 실은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던 사치코가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며 만들어낸 이후에 만들어낸 일종의 망령인 것은 아닐까 넘겨 짚게 되었다. 어쨌든 나가사키는 히로시마 다음으로 원폭이 투하된 곳이고, 사치코는 그곳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소녀였으니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Kazuo Ishiguro / 김남주 역 / 창백한 언덕 풍경 (A Pale View of Hills) / 민음사 / 245쪽 / 2012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