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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6. 2024

황정은 《파씨의 입문》

내 혀의 깊숙한 곳에서 좋아하는 리드미컬한 문장들...

  작가의 문장이 리드미컬하여서 나는 작가의 문장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내 머리가 좋아한다기보다는 내 혀의 깊숙한 곳이 좋아한다. 나의 눈도 좋아한다. 작가는 쉼표와 마침표를 사용하여 리듬을 부여하고, 박자를 나누는 것처럼 문단을 나눈다. 의성어와 의태어를 사용하면서 천연덕스럽고, 애드벌룬처럼 허공으로 명제를 띄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지 않고 공히 문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야행夜行」

  한씨와 고씨와 그들의 자녀인 곰과 밈은 검정과 그들의 부모인 백씨와 박씨의 집으로 밤에 찾아든다. 동서지간인 혹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략 그런 사이인 고씨와 박씨 사이에 벌어졌던 언쟁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거기다 이 시계. 아무래도 고장난 거 아닌가. 왜냐하면. 그보다. 보통 시계 소리를 이렇지 않잖아. ‘똑’하고 ‘딱’은 아니더라도. 그거야, 손목시계니까. ‘틱’이라든지. ‘째깍’이라든지. 그런데... 책... 책... 무슨 시계 소리가. 책. 책. 책...” (p.19) 형인 한씨의 아내인 박씨의 언동에서 느낀 서운함을 토로하고, 동생인 백씨의 아내 박씨는 고씨의 불필요한 오해를 타박한다. 야밤의 방문과 퇴장, 그리고 이들이 대화 사이로 책, 책, 책, 하면서 시간이 흘러간다.


  「대니 드비토」

  유라가 죽었다. 유도 씨는 남아서 살고 있다. 유라는 죽었지만 그 방에 남아 있다. “... 어쨌든 죽으면, 나는 틀림없이 유도 씨한테 붙을 거다. 난 죽어서도 쓸쓸할 테니까, 유도 씨가 반드시 붙여줘야 돼.” (p.42) 죽기 전에 유라는 이렇게 말했고 그 말에 유도 씨는 응, 이라고 대답했다. 유라는 죽었고 죽었지만 방에 남았고 ‘사양하지 않고’ 가끔 유도 씨한테 붙는다. 그러한 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유도 씨는 미라 씨를 사귀고 결혼을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안, 이라는 딸이 태어났다. 미라 씨는 암으로 먼저 죽고, 안은 유도 씨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하지만 유도 씨는 거절한다. 유도 씨는 계속 나이를 먹고, 요양원 휠체어에 앉은 유도 씨, 그러한 유도 씨에게 죽은 유라 씨는 ‘희박해지려는 나를 모아서’ 점착한다.


  「낙하하다」

  “...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p.66) 이 문장이 여러 소설에 걸쳐 자주 등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술했을 법한 이 명제는 되풀이되고 되풀이된다. 그 되풀이가 이 소설에서의 낙하를 닮아 있다. “떨어지고 있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검은 공간을 하염없이 떨어져내릴 뿐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고 생각해두었다. 삼십년은 지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득하다. 삼일 정도 지났을 거라고 생각해도 아늑하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렇게 생각하기로 생각해두었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다.” (p.61)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의 꿈이 생각난다. 나는 떨어졌고 떨어진다고 느꼈고 크게 비명을 질렀으며 바닥에 닿아 찌그러질 끔찍한 순간을 예감하였는데, 예감은 예감일 뿐 바닥에 닿지 못하고, 바닥에 닿을 것이라는 예감만은 선명해서 계속 비명을 지르다가, 그만 지쳐 버리는 그런 꿈...


  「옹기전甕器傳」

  “... 버리는 것은 아니고 제자리에 돌려두는 것이라고 생각을 돌려먹고 항아리를 들고 나섰다. 나는 그것을 옆동네에서 주웠다. 바닥에서 파냈다. 목적이 있어서 그 동네까지 간 것은 아니었다. 사는 게 쓸쓸하고 울적해서 나뭇가지로 벽 따위를 두드리며 무작정 걷다가 거기까지 갔다...” (p.84) 주워온 항아리 때문에 부모님에게 혼나고 그 항아리를 살짝 자신의 방으로 가져오고, 항아리는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라고 말하고, 나는 그 항아리를 들고 길에 나선다.


  「묘씨생猫氏生」

  “이 몸은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났다... 이 몸은 시방 인간들이 둘러놓은 장막 안에서 이 몸을 더럽히는 세계가 완파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묘생猫生 십오년, 인간으로부터 받은 이름은 몸, 나는 인간의 우방이 아니다.” (pp.105~106) ‘세계가 완파되기를 기다라고 있다’는 말, ‘나는 인간의 우방이 아니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양산 펴기」

  일인분에 삼만원이라는 장어를 먹으러 가자고 졸랐던 녹두, 그것을 위해서 모아놓은 돈을 쓰자가 졸랐던 녹두, 그 녹두에게는 비밀로 한 채 나는 한 구청 앞 바자회에서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양산은 펼칠 때는 편하지만 접을 때는 펼칠 때만큼 편하지 않다. 그래도 나는 연습을 해서 양산을 펼치고 접는다. 바자회 건너편에서는 자신들의 요구를 위한 사람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사실 나는 장어를 먹기보다는 지구본을 가지고 싶었는데...


  「디디의 우산」

  “... 빌려준 우산에 관한 것은 잊은 듯 무심했으나 디디는 도도의 우산을 신경썼다. 우산 하나를 빚졌다는 생각에 비 오는 날엔 마음이 무거웠다. 도도의 목소리를 듣거나 도도가 근처에 있으면 고리 모양의 우산 손잡이가 목에 걸린 것처럼 그쪽 방향으로 몸이 무거워졌다. 도도와는 본래 자주 말을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날 이후 더욱 말을 나누는 일 없는 사이가 되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pp.160~161) 그리고 성인이 되어 디디는 도도를 다시 만났고 우산이 없던 날의 도도에게 우산을 건넸고, 디디와 도도는 같은 방에 사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디디와 도도의 문제는 아니다.


  「뼈 도둑」

  개수구멍이 없는 개수대, 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그것은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니 현실적, 이라기 보다는 현실, 같다. 


  「파씨의 입문」

  “... 파도가 온다, 누군가 외칩니다. 파씨의 머릿속은 격렬해집니다. 이제 곧 거품 속에서 솟아오를 그는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형상일 것이고 얼마나 끔찍하게 사람들을 덮쳐올 것인가. 달아나고 싶지만 어깨를 누르고 있는 손 때문에 달아나지 못하고 파씨는 바다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구백칠십구년 팔월의 기억, 파씨는 파씨의 왼쪽 머리를 눌러 보이겠습니다. 말하자면 이 부근입니다. 최초의 기억과 초초의 질문과 최초의 정서가 시작된 지점, 여기가 바로 겨자씨만한 파씨, 파씨의 발생, 조그만 주름의 시작입니다...” (p.211) 이것이 바로 파씨의 발생 지점이다. 파씨는 다른 소설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파씨의 발생 지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황정은 / 파씨의 입문 / 창비 / 229쪽 / 20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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