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못하는 마음들조차 뛰어넘는 이 시대 삶들의 고단함...
“젓가락으로 굵은 면발 하나를 건져 먹는다. 젊은 시절엔 이런 면 음식을 즐겨 먹었다. 세 끼 중 한 끼를 꼭 면으로 해결할 정도였다. 면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제는 먹고 나서가 문제다.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부룩한 배를 어루만지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지.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p.8)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부모 세대의 자식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마음보다 자식 세대의 부모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더 클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자식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부모 세대의 아쉬움보다 부모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자식 세대의 안타까움이 더 클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지난 연말과 올해 연초를 거치면서 이러한 생각은 극대화되었다. 그리고 명절을 보내면서 이러한 생각은 반복된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 (pp.22~23)
여기 육십이 넘은 엄마가 있다. 남편은 죽었고 요양 보호사로 일하며 자신의 생활을 꾸려 나간다. 엄마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삼십대의 그녀는 대학의 시간 강사로 일하고 있는데, 월세조차 감당하지 못하여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혼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룸메이트가 있고 룸메이트는 그녀와 동성이다. 두 사람은 칠 년째 사귀고 있으며 서로를 그린과 레인이라는 닉 네임으로 부르는 사이다.
“...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할 수 없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 이제 나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런 말을 도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을까. 누가 들어 주기나 할까. 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말. 주인이 없는 말들.” (p.54)
엄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는커녕 어떻게든 딸애를 정상(?)으로 만들고 싶다. 그 사이 엄마는 자신이 간호하던 젠이라는 노인이 겪는 부당한 처우를 그저 보고만 있지 못한다. 딸은 딸대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의를 빼앗긴 동료의 부당한 해고를 그저 보고만 있지 못한다. 엄마는 젠을 집으로 데려오고, 딸은 부당한 해고에 반대하는 집회를 조직하고 참가한다.
“세상일이라니. 자신과 무관한 일은 죄다 세상일이고 그래서 안 보이는 데로 치워 버리면 그만이라는 그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 저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저렇게 말하겠지. 제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겠지. 그러면 그 자식들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또 그렇게 말하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 세상일이라고 멀리 치워 버릴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둘씩 만들어지는 거겠지. 한두 사람으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뭔가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p.126)
소설은 엄마와 딸이 겪는 지금 당장의 고난을 보여준다. 딸의 성적 정체성은 이 두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고난을 더욱 짙게 만든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그저 ‘세상일’이라고 치부되는 사이에 더욱 곤고해질 것이다. 엄마는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딱히 딸의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엄마는 엄마의 방식대로 엄마가 겪은 일을 통하여 그렇게 된다. 그래서 다행이다.
“... 나는 이 애들이 나로부터 얼마나 먼 곳에 어떤 모습으로, 어디를 딛고 서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그곳에 서서 이 애들이 무엇을 보는지, 보려고 하는지, 보게 될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pp.149~150)
생각해보면 고작 삼십 년의 한 세대, 길어진 수명을 생각한다면 부모와 자식 세대는 이제 하나의 카테고리로 간주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변화 속도가 아무리 빨라지고 있다고 하여도 속해 있는 계급의 변화가 불가능한 현시대를 고려한다면 양쪽의 세대가 느끼는 심난함은 질에서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양적으로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공유의 마음이 발생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p.197)
김혜진 / 딸에 대하여 / 민음사 / 214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