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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6. 2024

강화길 《다른 사람》

폭력에 무릎 꿇은 채 스러진 외로운 마음들을 기리는 또 다른 마음들...

  진아는 자신의 직장 상사와 일 년여 기간 동안 연애를 아니 연애라고 생각하는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다섯 차례의 폭행을 당했고, 그 데이트 폭력이 다섯 번에 이르러서야 그와의 관계를 끝냈다. 신고를 했고 그는 처벌을 받았지만 벌금형에 불과했다. 그녀는 인터넷에 자시의 이야기를 공론화시켰지만 오히려 악성의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를 떠난 것은 그녀였고, 그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모두 끝난 게 아니라는 전언이었고, 그녀는 그 문자에 답변을 보내지 못했다.


  “그의 말은 거꾸로 비추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그 거울 속에 내 얼굴은 뒤집혀 비쳤다. 그의 확신이 사라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게 분명했지만 나는 뒤집힌 채 늘 웃었다. 그게 예뻐 보였다.” (p.18)


  그녀는 자신이 인터넷에 쓴 글에 달린 댓글들을 읽다가,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진공청소기라는 별명을 언급하는 발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십여년 전 자신이 다니던 지방의 한 대학, 그곳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떠올린다. 그곳에는 진아와 수진, 그리고 유리가 있었다. 또한 진아가 한때 사모하였고 수진과 사귀게 된 현규, 진아와 한때 사귀었고 4개월만에 관계가 끝난 동희가 있었다. 


  “... 우리는 친구였지만 동등하지는 않았다. 그 애들은 언제든지 나를 따돌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해다. 그 애들이 내게 친절한 건 착한 마음을 쓰는 일이었지만 내가 그들에게 친절한 건 따돌림받지 않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p.40)


  대학 시절보다 더 거슬러 진아와 수진 사이에는 한 동네에서 공유한 기억 또한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친했다가 다시 멀어졌고 다시 가까워졌다가 아예 관계가 끝나버렸다. 그렇게 대학에서 대면한 두 사람은 그 이후에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진아는 댓글의 작성자로 수진을 지목하지만 수진은 미친년, 이라는 한 마디로 진아의 의심을 일축한다. 진아는 수진을 닦달하지만 오히려 알게 되는 것은 유리를 둘러싼 의심스러운 정황들 뿐이다.


  “개소리다. 이강현은 오빠를 믿었다는 여학생들의 울음소리 못지 않게 남자는 아랫도리가 빳빳해지는 걸 참는 게 힘들다는 말을 경멸한다. 이건 욕구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p.259)


  하지만 유리는 이미 그 시절, 그러니까 내가 그 지방의 대학에서 서울로 편입한 직후 교통 사고로 죽었다. 죽은 유리에 대한 진아의 마지막 기억은 도움을 요청하는 골목길에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진아는 유리가 내미는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어쩌면 진아는 늦었지만 이제 와서 그 손을 잡아주려고 한다. 그때 이미 자신이 겪은 많은 일들, 그것으로부터 피하려고 했던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제자리로 되돌릴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 제가 너무나도 그런 감정에 시달려왔기 때문에, 그런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누군가의 손길을 너무나도 갈망하지만, 지독하게 두려움으로 가득 찬 얼굴...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막상 그 사람을 붙들면 불안에 휩싸이죠. 이걸 잃어버리게 될까 봐... 그 불안 때문에 관계를 지속할 수 없죠. 왜냐하면 타인은 알아채니까요. 그리고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만날 수가 없죠. 누구도 저를 감당하지 못했어요. 죽고 싶었죠. 유리의 얼굴에도 그게 있었어요. 계속 유린당하는 사람의 분노가 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리는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을 겁니다. 사실 화가 나 있는 건데, 정작 본인은 모르는 거예요. 그 감정을 분출하는 순간, 정말로 외톨이가 되어버릴까 봐 두려우니까.” (p.289)


  소설을 모두 읽고 나면 이제 우리는 사건의 실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리는 이미 죽었고, 내가 겪은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인 그는 여전히 잘 살고 있다. 그럼에도 유리가 되고자 했던 ‘다른 사람’, 그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남은 진아, 많은 진아들의 몫일 것이다. 진아가 이제 가해자인 그에게 먼저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강화길 / 다른 사람 / 한겨레출판 / 342쪽 / 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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