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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6. 2024

황정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경쾌하고 리얼하게 진행되는 환상의 끄트머리를 잡고...

 「문」

  “그것은 상아색의 무늬가 없는 문으로, 양파처럼 둥근 구리 손잡이가 하나 달려 있었는데 그것을 비틀어 열려면 그 문을 향해 돌아서야 했으므로 m의 입장에서는 결코 열 수 없는 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문은 언제나 m의 등뒤에, 한두 발짝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m이 그 문을 좀 자세히 보려고 뒤로 돌아서면 문도 돌아서 m의 등뒤로 갔다. 언제나 닫혀 있는 문을 두 개의 거울을 통해서나 볼 수 있었던 m은 문이 열리는 것을 느꼈고, 사실을 말하자면, 할머니의 출현에 앞서 그것이 열렸다는 것에 먼저 놀랐다. 저게 열리기도 하는구나.” (pp.10~11) 자신의 등뒤에 문이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열린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이 최초였다. 그 문을 통해 죽은 할머니가 내게로 나왔고 어느 순간 할머니는 다시 그 문을 통해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르고 나는 두리안이라는 과일로 지칭되는 한 남자의 죽음을, 그리고 그 남자가 내 등뒤의 문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한다. 환상 소설과 같은 설정이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경쾌하고 리얼하다. ‘m은 길음에서 내렸다.’라는 방식의 마지막 문장이 그 경쾌함과 리얼함을 만들어내는 센스의 기원일지도 모르겠다. 


  「모자」

  “세 남매의 아버지는 자주 모자가 되었다... 이사를 하면 첫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장도리를 들고 다니며 벽에 박힌 못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못이 있으면 아버지가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거기 걸리고, 틀림없이 모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일단 모자가 되면 언제 아버지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못이 있을 때만 모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남이 보는 곳에서도 곧잘 모자가 되곤 해서, 소문이 번지는 바람에 그들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p.39) 카프카의 <변신>의 사물 버전, 그리고 덜 우울한 버전이라고나 할까. 자꾸 모자로 변신하고마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변신에 대해 갖는 세 자매의 기억을 퍼즐처럼 맞추다 보면 그 변신의 기원을 알 것도 같다.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나와 파씨와 파씨의 동생 기린의 동물원 여행... “우리를 만들어서 동물들을 넣어두고 관람료를 받는 일 같은 것을 인간 외에 어떤 동물이 생각해내겠어. 동물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고 동물을 관람하는 인간이 있고 동물을 관람하는 인간들을 관리하는 인간이 있고 그런 인간들에게 통제되고 영향받는 소수의 동물들이 있는 곳. 압도적인 인간의 영역, 그게 동물원이야...” (p.85) 그 동물원을 운행하는 코끼리 열차, 그 열차가 동물원으로부터 그 바깥을 향해 운행하는 마지막 시간 같은 것...


  「무지개풀」

  “.. 풀이 너무 거대하다고 P는 생각했다. 한쪽 모서리는 욕실 입구를 막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싱크대 앞을 막고 있었는데, 가스레인지 쪽은 아예 풀 속에 두 발을 들여놓지 않고는 접근할 수 없는 상태였고 또다른 한쪽은 냉장고에 너무 가까워 냉장고 문이 반밖에 열리지 않는 상태였다...” (p.117) 이처럼 거대한 풀을 사오고, 그것에 바람을 넣고 물을 넣고, 고민에 빠져 버리는 P와 K... P와 K의 관계가 궁금하기도 한데, 그러니까 끊임없이 맥락 없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한데...


  「모기씨」

  미오 그리고 체셔... 장구벌레가 사라졌으니 모기가 존재할 것인데, 결국 모기가 등장하지만 그 모기는 내게 말을 걸기도 하고... 


  「초코맨의 사회」

  아주 짧은 소설, 이런 식의 아주 짧은 소설이라면 괜찮겠다. 열심히 노력하여 초코맨이 되었으나 그만 초코의 유행이 끝나고 치즈가 유행하는 바람에 다시 치즈맨으로 재사회화 트레이닝을 받았으나 이제 복고 바람이 불어 다시 초코가 대세가 되어 다시 초코맨이 되어야 하나, 하는 고민이 필요한...


  「곡도와 살고 있다」

  곡도의 존재가 꽤나 흥미롭다. “... 고양이는 잠들어서 축 늘어져 있었어. 평범해 보이는 얼룩고양이였는데 등과 뒷다리에 강낭콩 같기도 하고 발자국 같기도 한 모양의 큼직한 반전이 번져 있었지. 무슨 색이었냐고 묻는다면, 맵지 않은 카레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곡도. 고양이와는 완전 다른 생물이야.” (p.160) 출장을 다녀온 파씨가 가져온 영락없이 고양이인, 그러나 곡도이고 곡도이어야만 하는 곡도와 함께 생활하게 된 G... 곡도에 대한 가이드북을 잘 읽어야만 한다.


  「오뚝이와 지빠귀」

  “기조는 그날 이후로도 종종 기울어졌다. 날이 갈수록 뺨이며 배가 볼록해지고 광택이 흐르기 시작해서 어쩌려나 싶어 유심히 관찰했더니, 기조는 오뚝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pp.198~199) 조금씩 작아지고 그리고 가끔 기울더니 그만 오뚝이가 되어버린 기조, 오뚝이보다는 지빠귀가 되고 싶었던 기조, 그러한 기조의 곁에 있는 무도씨...


  「마더」

  “인사를 하는 일도 안부를 묻는 일도 없다. 나이도 묻지 않고 이름은 더구나 묻지 않는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에 대한 리포트를 제출받아 회원을 선발한다. 그러나 평가가 까다로워 근래에 새롭게 들어온 회원은 없다. 오를 포함한 네 명의 회원은 모두 ‘티파니’로 불린다. 일주일에 한 번, 온라인에서 만나 투표를 한다. 당신은 살고 싶은가. 답은 예스, 노로 선택된다. 한 사람이라도 ‘예스’를 선택한 순간에 접속은 끊어진다. 오프라인 모임은 단 한 번. 언젠가 죽음이 결정되는 날에 열릴 것이다.” (p.219) ‘오’를 버린 마더, ‘오’가 가입한 모임의 ‘티파니들’, ‘오’가 집으로 데려온 동물 ‘마더’... 아직 티파니의 오프라인 모임은 발생하지 않았다.


  「소년」

  소년과 소년의 엄마, 소년의 동생 구야, 소년의 엄마와 함께 눕는 남자... 좁은 방 안의 풍경 그리고 전철 내외부의 풍경이 계속 흘러간다. <마더>와 함께 <소년>은 경쾌함이 사라진 어두운 현실 너무 어두워서 환상의 자리를 넘보는 현실의 풍경 같아서 무겁다.


  「G」

  또다시 아주 짧은 소설... F가 아니라 ‘F의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되어버린 생쥐’ 그리고 손톱을 깎고 있을 'F'... 



황정은 /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 / 문학동네 / 293쪽 / 200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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