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민첩하게 현실적이거나 보다 비약적으로 비현실적이거나...
*2017년 9월 1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두 주에 걸쳐 HBO의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시즌1부터 섭렵하였다. 지난 주말에 시즌7의 마지막 두 편을 봄으로써 긴긴 여정을 마무리했다. 시즌1에서 시즌4까지 보는 동안에는 새벽 두 시쯤이면 어떻게든 시청을 멈추고 책을 들었다. 터키 작가 사이트 파이크 아바스야느크의 단편선을 읽으려 했는데 실패했다. 한 편에 평균 한 시간, 한 시즌이 열 편 그러니까 시즌 당 열 시간짜리 드라마에는 심하게 몰입하였으나 여섯 페이지에서 여덟 페이지 정도의 짧은 소설에 집중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 어떤 날에는 모든 것이 괜찮고 제대로인 듯하지만 어떤 날에는 반만 그렇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불행히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흔한 아침인 걸까...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시작되고 있는 그들의 아침이 이 작고 완전한 프레임의 사진들처럼 온전할지, 그러니까 제대로일지, 혹시 잘려나간 어느 편에서는 울고 나서 맞는 아침은 아닐지 생각하면서.” (pp.18~19, 김금희 <그의 에그머핀 2분의 1> 중)
이야기의 길이와 이야기의 몰입도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실감하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릴 좋은 문장을 열렬히 원하는 세대들에 의하여 시집 판매부수가 크게 신장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경장편 분량의 소설들이 새로 발매되는 소설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각종 문학상들의 수상작들이 바로 그 분량의 소설들이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여자가 눈을 비비고는 나에게서 등을 돌려 눕습니다. 나는 여자가 편히 잘 수 있도록 화장실 앞으로 가 앉습니다. 이 작은 방에는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 있습니다. 화장실, 책장, 행거, 매트리스, 주방까지. 나는 어디에 앉아 있어도 이 방 안에만 있는다면 여자를 잘 볼 수 있습니다.” (pp.22~23, 김남숙 <교대> 중)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엽편葉片소설 혹은 장편掌篇소설이라 불리울 수 있는 소설들에 대한 대중의 소구가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에 기반한 짧은 소설 컨텐츠가 등장하였다. ‘짧아도 괜찮아’라는 선집의 첫 번째 권으로 포지션을 정한 《이해 없이 당분간》에는 신진과 중진을 가리지 않은 스물 두 명의 작가가 목록에 이름을 올렸고, 이들의 소설은 길어야 십여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의뢰인에게 이끼가 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던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즘은 이끼가 되는 것이 전혀 인기가 없는 시대인데도 고작 자신의 꿈이라는 이유로 이끼가 되어버렸다고,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이끼가 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종 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의뢰인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p.110, 송지현 <탐정과 오소리의 사건 일지> 중)
소설을 읽으면서 꽁트와 엽편 소설의 차이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보통은 꽁트와 엽편 소설을 같은 것으로 분류하지만 의외로 꽁트와 엽편 소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풍자와 유머 그리고 일종의 반전이 그 짧은 분량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이 꽁트라면, 엽편 소설은 이러한 약속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형태인 것이 아닐까.
“2077년, 인류는 모두 같은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2015년 한국에서부터 퍼진 전염병 때문이다. 그 전염병의 치사율은 0%. 어떤 물리적 고통도 없다. 다만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얼굴로 변할 뿐이다. 30대 중반의 남자 얼굴. 그 얼굴은 다소 우울하고 신경질적으로 생겼다. 그 얼굴은 쉽게 찡그려지고 웃을 때는 온 힘을 다해야 근육이 작동했다. 그 얼굴은 결심과 후회가 범벅이 된 얼굴이다. 웃을 때보다 화낼 때가, 화낼 때보다 인내할 때가, 인내할 때보다 슬플 때 더 어울리는 얼굴이다.” (p.165, 임승훈 <2077년, 여름 방학, 첫사랑> 중)
그렇게, 책에 실린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읽어온 기존의 소설들과 비교하여 보다 밀접하게 혹은 민첩하게 현실에 맞닿아 있거나 보다 멀리 비약적으로 비현실적인 어떤 영역에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이 지역에 발을 디딘 작가들 중 어떤 이가 계속해서 이곳에 남게 될 것인지 아니면 얼른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인지, 또는 얼마나 더 많은 작가들이 이 영역 안을 기웃거리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김금희 외 / 이해 없이 당분간 / 걷는사람 / 234쪽 / 2017 (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