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사건 내부의 개인들에 대하여...
“시간의 감옥, 언어의 감옥, 냉전의 박물관과도 같은 분단된 한반도라는 감옥에서 작가로서 살아온 내가 갈망했던 자유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던가... 이 책의 제목이 ‘수인囚人’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2권, pp.448~449)
황석영의 자서전이 두 권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작가의 방북이 있었다. 산에서 행식이 좋지 않은 이가 내려오면 간첩으로 의심부터 하고 신고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은 우리에게 그의 방북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찌들어 있는 굳은 머리에 가하는 망치질 같은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대학생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가 있었고,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그들의 생활은 단조롭고 조직되어 있었다. 그들은 허락된 범위 안에서만 자유로울 뿐 개인적인 일탈은 조직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나는 이른바 고위층이라는 간부들과 수령인 김일성 주석마저 매우 단조롭고 심심하고 외로울 거라고 상상했다. 실제 평양에서의 내 일상이 그러한 단조로움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1권, p.192)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는 방북 이후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왔고 곧바로 검거되어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작가는 이후 남쪽으로 내려오는 대신 독일행을 택한다. 베를린에서 그리고 뉴욕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작가는 1993년 귀국한다. 그는 7년 형을 선고받았고, 그중 5년여를 감옥에 있었다. 작가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그의 방북기가 출간되었다.
"... 당시 남측은 ‘국가연합’으로 북측은 ‘연방제’로 통일방안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는데, 사실은 글자만 몇 개 다를 뿐 같은 소리였다. 문목사가 남측의 형편상 중간에 과도적 기간이 있어야 한다고 떼를 써서 김일성 주석이 한발 물러섰다고 하는 것이 ‘느슨한’ 또는 ‘낮은 단계’를 앞에 붙인 연방제 안이었다... ‘느슨한’은 이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남북 위기의 시기마다 어떻게 해야되는지를 잘 드러내는 정신이 되었던 것 같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느슨한’ 통일관에 대해 감상적 통일관이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는 당신들은 현실화되지 않은 내일을 현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제 김일성도 죽고 그의 후계자였던 아들 김정일도 죽었는데 북한이 붕괴했는가, 반세기 이상이나 한반도 북쪽에서 버티어오던 정치세력이 그렇게 간단하게 일시에 무너질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붕괴를 요행수로 바라고 강경한 대북정책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또한 갑자기 무너진다면 매우 위험한 노릇이기도 하고, 우리가 개입하고 주돍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는 8 · 15 때처럼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하여튼 남북 모두가 살길을 찾으려면 우리가 주인답게 변화를 이끌어내야만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1권, pp.203~204)
황구라라는 별명으로 익히 알려진 그의 소설을 읽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삼포 가는 길>은 티비를 통해 먼저 보았던 것 같다. <객지>나 <한씨연대기>, <돼지꿈>과 같은 중편들, 그리고 《무기의 그늘》과 같은 장편을 읽은 기억이 난다. 노동 문제, 빈민 문제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운 전쟁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꽤나 선구적으로 글을 썼고, 그것은 그가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현장 깊숙이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십 년에 걸쳐 《장길산》이 완성되기까지 그에 얽힌 일화와 우여곡절은 다 열거할 수도 없다. 연재를 하던 중에도 일은 끊임없이 터져서 농성이며 시위며 선언문 발표현장을 쫓아다녀야 했는데 나는 원고와 메모한 자료 수첩만 가지고 집에서 나와 시내 여관에서 묵는 날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현장활동이 내 소설에 해를 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당대 민중들의 인물상과 일화와 생각을 조선시대 먼 옛날 조상 민초들의 삶으로 되살려낼 수 있었고 언제나 우리 시대 상황의 높낮이를 소설에 반영하려고 애썼다.” (2권, p.340)
현장의 기억을 글로 쓰고 또 그 기억을 배신할 수 없었으므로 할동가의 삶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가 두 권의 기록에서 깨알 같다. 그가 만약 작가로서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황석영의 모습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을는지 모르겠다. 정치범이면서 동시에 유명한 소설가였기 때문에 그가 피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을 터이다. 작가가 드러내는 그 성정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것을 피하지 못했을 때의 그가 안쓰럽게 상상된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상대방이 오해를 하면 즉시 해명을 하거나 정면으로 대들지 않고 소통을 피해버리는 성미다. 그래서 끝내 오해가 풀리지 않은 채 세월이 흘러 상대방에게 왜곡된 인상으로 남아도 억울함을 해결할 도리가 없다. 재담꾼으로 알려진 내가 사실은 수줍고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이 알 도리가 없듯이 말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재담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미리 선수를 친다고나 할까. 먼저 이쪽에서 떠들썩하면 대개 상대방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놓치기 마련이므로.” (2권, p.41)
주로 읽고 싶은 책들을 구매하여 읽는 편이다. 그런데 때로는 읽어야 하는 책들이기에 구매하여 읽기도 한다. 황석영의 자서전은 아마도 후자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의 글에 등장하는 많은 공적인 그리고 사적인 인물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 내부의 개인이었던 작가를 우리는 모른 체 할 수 없다. 그가 이 땅에서 나고 자라 방북으로 인한 수감 생활을 끝마친 1998년까지의 삶의 요약은 아래와 같다.
1943년 만주 장춘 출생, 1945년 평양의 외가로 나옴, 1947년 월남하여 영등포에 정착, 1960년 4.19 때 함께 있던 안종길이 경찰의 총탄에 희생됨, 1961년 경복고 휴학, 1962년 11월 단편 <입석 부근>이 《사상계》 신인문학상 수상, 1966년 입대, 1967년 베트남 파병, 1969년 제대,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탑>이 당선, 1974년 단편집 《객지》 출간, 한국일보에 대하소설 《장길산》 연재 시작, 1979년 계엄법 위반으로 검거 후 기소유예, 1984년 《장길산》(현암사)을 10권으로 완간, 1985년 광주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가 지하 출판, 1989년 방북 이후 1993년까지 망명 생활, 1991년 11월까지 베를린 체류, 1991년 이후 뉴욕 체류, 1993년 4월 귀국, 귀국 후 곧바로 검거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고 1998년 석방...
황석영 / 수인1 : 경계를 넘다, 수인2 : 불꽃 속으로 / 문학동네 / 전2권 1권 493쪽, 2권 461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