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의 도래, 이야기는 크고 인물들은 많고...
“... 인간은 모두 사라지고 동식물만 남아. 근데 인간들이 자기가 죽은 걸 모르고 유령으로 계속 살아가는 겅. 영화 「식스센스」처럼... 거기 말콤 박사처럼. 다들 유령이니까 당신 유령이야 하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고. 유령이니까 죽지도 않지. 빙하기가 와서 동식물도 다 사라져 버리고 해빙기가 아서 또 다른 생물이 나타나고, 지구가 온갖 것을 만들고 없애고 또 만들어내는 수십억 년 동안 인간은 유령으로 계속 존재하는 거야. 자기들이 유령인지도 모르고 지구 환경과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p.186)
소설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고 있다. 갑작스러운 바이러스의 창궐, 그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가족의 해체 나아가 국가의 해체가 이루어진 세계라는 공간 그리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공간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소설에 있다.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인간성이 결여된 인간들을 들여다봐야 하고, 인간성이 결여된 인간들 안에서 그래도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인물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사람들은 바이러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바이러스가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냥 중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믿어서도 안 된다. 뒤돌아서는 순간 당할 수 있다. 뒷걸음치는 것으로 약한 모습을 보여도 당할 수 있다. 심지어 어린 아이의 간이 병에 좋다는 말이 있어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으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들에서 확인되던 바로 그 세상이다.
“... 희망은 내가 움직여야 닿을 수 있는 대륙이 아니라 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속도로 움직이는 지구가 태양을 돌다 보면 나타나는 밝고 따뜻한 계절.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서 그 계절을 맞이하는 것뿐인지도.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겠지. 희망은 시간처럼 머무르지 않고 오고 가는 것...” (p.23)
아내인 류와 남편 단, 그리고 해림과 해민 남매로 이루어진 가족은 대한민국을 버리고 러시아로 탈출하였다. 이 가족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 도리는 동생인 미소와 함께 러시아를 떠도는 중이다. 도리는 떠도는 중에 대식구를 이루고 돌아다니는 가족의 일원인 지나를 만난다. 도리는 지나를 통해 사람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고, 지나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의 그룹에는 혈연이 아닌 소년 건지가 있고, 건지는 미소를 챙긴다.
러시아를 떠도는 이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보듬는다. 특히나 도리가 겪는 사건은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오히려 피상적이다. 이후 이 구체적인 피상성은 지나가 겪는 상황들과 통하게 된다. 길 위의 성장통을 다루었던 작가의 전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이 소설에 이르러서 구체적인 이름들을 부여받지만, 여전히 그 이름을 그 이름으로 받아들이기 힘겹다.
“...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을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 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p.90)
많지 않은 분량의 소설에서 다루기에는 이야기의 크기가 크고,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너무 많다는 느낌이다. 이야기의 주체를 바꾸어가며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또한 그렇게 큰 이야기와 많은 등장인물을 다루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작가가 선택한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니었나싶다. 인물들 각자를 향한 역할의 분배와 그 역할들을 기저로 한 관계 맺기의 방식에 보다 심사숙고가 있으면 좋겠다.
최진영 / 해가 지는 곳으로 / 민음사 / 205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