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반反半의 자전 소설에서 읽어내야 하는 자살 이후의 전설...
“... 기억이란 실제보다 아주아주 풍요롭다. 과거로의 회상은 기억 자체로부터 기억 하나를 덜어낼 뿐이다. 기억이 삶 또는 자아를 세우는 기반인 한, 귀향은 삶과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p.278)
책의 날개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 약력과 간단한 소개에 ‘반자전적 소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한자가 없으니 여기서의 ‘반’이 절반만 자전적이라는 ‘반半’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전에 반한다는 ‘반反’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책을 읽기도 전에 잠시 난감하였는데, 책을 모두 읽은 지금도 여전히 그 ‘반’을 어떤 ‘반’으로 읽어야할지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묘하게도 나는 그 반이 어떤 반이어도 상관없고 아예 ‘반반反半’이어도 여기게 되었다.
“... 아버지는 돌에 새긴 조각만큼이나 딱딱해 보였다. 생각도 쇠심줄만큼이나 질겼다. 지금의 아버지와 또 다른 아버지, 그러니까 툭하면 울고 절망에 빠지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아버지는 도저히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두 아버지를 모두 알기는 하지만 어떤 순간 어느 아버지와 함께 있든, 오로지 그 순간의 아버지일 뿐이다. 순서가 되면 다른 아버지는 불에 타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p.133)
《자살의 소설》이라는 한 권으로 묶인 책에는 「어류학」, 「로다」, 「선인善人의 전설」, 「케치칸」, 「높고 푸르게」라는 다섯 개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고, 그 중간에 「수콴 섬」이라는 조금 긴 중편 소설이 자리 잡고 있다. ‘자살의 소설’이라는 소설은 없지만 각각의 소설에는 자살하는 이 혹은 자살과 관련된 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중첩되고, 그 중첩의 중심에는 바로 작가가 경험한 자살이 있다.
“... 나는 지금도 이런 식의 글쓰기를 생각한다. 무의식적 과정 속에서 뭔가를 쫓겨 지켜보는데, 바로 그 뭔가가 점점 모양을 바꾸며 커지더니, 수면에 다다를 때쯤엔 완전히 불가능하거나 종종 터무니없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그 황무지와 숲과 비의 풍경을 무의식이 채워야 할 일종의 백지로 여긴다.” (p.309,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말 중)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 알래스카의 여러 섬이 자리 잡고 있는데, 실제로 작가는 알레스카의 케치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를 따라 켈리포니아로 이주했으나, 바로 다음 해인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알래스카에 혼자 머물고 있던 아버지가 자살한다. 소설에는 이렇게 자살로 소멸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전과정에 삼투압처럼 스며들어 있는 자기 자신(그러니까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남자 친구 혹은 아버지의 여자 친구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아버지의 존재나 부재를 가리키는 신호 혹은 알람 같다.
『어머니와 나는 각각 나름의 일상이 있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집 근처 국립공원에서 산책을 즐기고,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리고 이따금 ‘며칠 어디 다녀올게’ 또는 ‘친구 만나러 간다’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어떤 친구요?”라고 물으면 대답은 늘 “그래, 맞아”였다.』 (p.44)
소설 속 자살의 순간들은 주로 느닷없고 받아들이기에 난감하다. 어떤 기미나 내색을 발견하기 힘들다. 오히려 자실의 순간 이후에 우리를 되짚어볼 수 있을 뿐인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어린 시절 겪은 바로 그 부친의 자살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인 그가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던 그러나 바로 그 사건 이후 자꾸 곱씹고 되짚어보아야만 하는 커다란 전설이 되고 마는, 그것이 바로 이 소설 속 ‘자살’들이다.
“... 사방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장막이 다른 모든 소리를 지워버렸다. 냄새도 그 하나뿐이었다. 땅과 바다 냄새, 고비와 쐐기풀과 썩은 나무 냄새까지도 모두 비 냄새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껏 맑은 날들은 예외에 불과했다. 집중호우. 집중호우가 가둔 세상. 이제 두 사람이 대적해야 할 상대였다. 비야말로 우리 고향이 될 것이다.” (p.105)
특히나 책의 중간에 실려 있는 중편 소설 「수콴 섬」에 등장하는 자살의 순간이야말로 급작스럽다. 그렇지만 되짚어보면 그리 급작스럽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런 이율배반을 그려내는 작가의 건조한 문체 또한 독자들을 놀래키는 데 한몫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 환경 그리고 그 안에 잠겨 있다 떠올라서 더욱 눈에 띄고 마는 인간 혹은 그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서술이 이래저래 잔혹하다.
데이비드 밴 David Vann / 조영학 역 / 자살의 전설 (Legend Of A Suicide) / 아르테 / 319쪽 / 2014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