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끝없는 수동성은 인간 청력의 근간' 그래서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by 우주에부는바람

“음악이 드문 것이었을 때, 음악의 소환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유혹 같은 것이었다.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게 되자 그것은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침묵이 모두가 부르짖는 장엄한 것의 자리에 놓였다.” (p.237)

‘음악 혐오’라는 책의 제목이 혹시 반어법인 것일까, 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책은 대체로 진짜 음악에 대한 혐오의 혐의로 채워져 있다. 은유와 환유로 가득한 문장들 그리고 짧은 인용과 긴 인용 그보다 더 긴 인용으로 혼란스럽지만 거기엔 확실히 좋지 않은 뭔가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을 눈으로 좇을 때마다 어떤 음들의 올라가고 내려감, 어떤 숨들의 들어오고 나감을 느끼는 것으로 독서의 즐거움의 대부분을 채워가는데...

“인간의 삶은 떠들썩하다. 우리는 그것을 소란 혹은 도시라 부른다. 인간들이 집적된 거대한 큐브형 집합체다. 소음noise은 인간 종이 지닌 체취와도 같다. 나폴리, 뉴욕, 로스앤젤레스, 도쿄. 이러한 도시들이 바로 현대의 끔찍한 음악이다.” (p.250)

지난 주말 소나기 속에 교보 문고로 향하였고, 거기서 책을 샀다. 도심은 빗속에서도 사람으로 가득하였고, 나는 그 중 하나였다. 나는 두 주에 걸쳐 많은 일을 했고 (네 개의 열과 만 개의 행에 숫자들을 채워 여섯 개의 파일을 만들었다) 일이 많아 토할 것 같다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했다. 지난 주말은 딱 그 중간에 위치하였고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으며 파스칼 키냐르의 신간을 샀는데 (프레데릭 파작의 신간과 함께)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읽지는 못했다.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9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Konzentra-tionlager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p.187)

장마의 한 복판이었던 두 주의 시간 동안 예상과는 달리 많은 비가 내렸다. 장마를 한 편의 오페라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내리고 있는 비는 몇 번째 막에 해당하는 것이고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음악일까 생각하며 운전하였다. 가끔 내리막에서 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때 나는 긴장하곤 했는데, 어떤 클라이맥스 같기도 해서 긴장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주가 지나갔다.

“우리는 극도로 상처 입은 어린아이와 같은 유성有聲의 나체를, 우리 심연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그 알몸을 천들로 감싸고 있다. 천은 세 종류다. 칸타타, 소나타, 시.

노래하는 것, 울리는 것, 말하는 것.

이 천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 몸이 내는 대부분의 소리를 타인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같이, 몇몇 음音들과 그보다 오래되 탄식에서 우리의 귀를 지켜 내려 한다.“ (p.9)

“나는 소리가 주는 고통과 음악의 지속적인 관계에 대해 질문해 본다... 공포와 음악. 음악mousikè과 공포pavor. 이 두 단어는 영원히 결속된 것만 같다. 비록 그 기원과 시대가 어긋난다 할지라도, 성기와 그것을 덮고 있는 천과 같이.” (p.13)

파스칼 키냐르가 다루는 음악은 음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게까지 가 닿아 있다. 어떠한 번복도 허용하지 않는 단 한 번의 연주,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그때 그 순간의 소리들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보편과 특수가 있다면 파스칼 키냐르는 철저히 특수의 편에 서 있다. 어떤 일반화도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 아니었다면 ‘음악 혐오’라는 제목을 (이 책의 원제목은 ‘음악의 증오’이지만 어쨌든) 가져올 용기가 어디서 나왔겠는가.

“활은 멀리 있는 죽음이다. 불가해한 죽음. 더 정확히는 목소리만큼이나 비가시적인 죽음이다. 성대, 리라의 현, 활시위는 죽은 짐승의 내장이나 혈관으로 만든 단일한 하나의 줄로, 거리를 두고 상대를 죽이는 비가시적인 소리를 발산한다. 활시위는 최초의 노래다...” (p.34)

“황혼은 자연의 질서 안에서 ‘소리의 영도零度e. 사실을 말하자면, 완전한 영도나 침묵의 정점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이 이루는 소리의 최소치임은 분명하다. 인류는 복종을 멈추지 않는다. 존재론에서 소리의 최소치는 새의 지저귐과 개구리 울음소리의 경계를 통해 정의된다. 침묵은 결코 소리의 부재로 정의되지 않는다. 침묵은 귀가 소리에 대해 가장 예민해져 있는 상태로 규정된다. 인류는 소리와 침묵이 발현되는 근원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더 이상 빛과 어둠의 기원에 머물지도 않는다. 밤의 문지방에서 귀는 가장 기민해진다.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나에게, 홀로 있기를 바라는 모든 시간 가운데 가장 홀로이고자 하는 때다. 내가 죽고 싶은 시간이다.” (p.129)

책은 열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두 번째 장의 제목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니, 책을 사고 읽은 그 사이 나는 눈꺼풀이 없는 귀처럼, 일을 한 것은 아닌지 짐작하게 되었다. 장마가 끝이 난 것인지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클라이맥스가 지난 것은 틀림없다. 그래도 이 주말 몇 차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 대기에 몇 개의 음들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끝없는 수동성(비가시적인 강제된 수신)은 인간 청력의 근간이다. 내가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고 요약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p.104)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 / 김유진 역 / 음악 혐오 (La haine de la musique) / 프란츠 Franz / 298쪽 / 2017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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