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과 사막이, 사랑과 죽음이, 북극곰과 낙타가, 소년과 어른이...
「북극인 김철」
“북극인 김철은 볼에 묻은 강바람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왜 소금기가 묻어 있지? 왜 바다 냄새가 나지? 북극인 김철은 판판한 유빙(遊氷) 위에 북극곰과 나란히 대자로 누워 둥둥 낮잠을 자고 싶었다. 북극곰의 두툼하고 강한 손바닥 위에 자신의 지치고 갈라진 손바닥을 포개어 올려놓고 싶었다.” (p.12) 이런 생각을 하던 김철은 곧이어 풍덩 소리와 함께 강에 뛰어든 한 사내를 구출해 놓고는 사라진다. 이후 이미 쫓기고 있던 김철은 배를 타고 국외로 나가려다 자신을 바짝 따라온 오재도 형사를 피해 바다에 뛰어든다.
「소년은 어떻게 미로가 되는가」
“연애소설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 이야기는 아무리 복잡하게 엮어도 자칫 빤하다. 스토리는 답답하기가 쉽고 유행을 따라가다 보면 문장 자체가 치졸해지기 마련이다. 아무리 고수라도 이 난관을 가볍게 피해 갈 길이 없다. 왜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라. 이 지구상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해봤자, 그게 뭐가 그렇게 유별나고 대단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연애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가장 황당한 경우는 분명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점점 공포물로 변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이다.” (pp.42~43) 피가 섞이지 않은 외삼촌 문장규는, 칼라시니코프의 총 AK-47을 가지고 있었고 내게 보여 주었던 문장규는 25층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날려 죽었다. “은파야, 여기는 겨울이 아닌데도 꼭 북극 같아. 여기는. 북극을 알아? 가봤어?” (p.62) 책의 곳곳에 북극의 흔적이 보인다. 사랑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으면서도, 또 여기 북극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서울에서 벌어지는 인연들이어서, 북극의 거대한 어떤을 끌어오고 싶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 사랑이여,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신을 알게 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로구나.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질문이 아닌 신은 전지전능하기는커녕 가짜다...” (p.68)
「북쪽 침상에 눕다」
북극과 사막의 일맥상통은 사랑과 죽음의 일맥상통과도 같은 것... 의료보조기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나와 무기상인 그와의 만남과도 같은 것... “... 북극곰은 두 살 때 어미 곁을 떠나 번식기에 잠시 짝짓기를 할 뿐 결코 가족을 이루는 법 없이 일생을 혼자 살아가는 지독한 단독자이다...” (p.102) 이런 상념 뒤에 나는 동물원 낙타 우리 안으로 훌쩍 뛰어든다.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
“... 태풍은 몸이 없다. 대신 태풍에 흔들리는 것들이 태풍의 몸인 것이다. 세상의 권력이 그러하듯...” (p.122) 유명한 정치인이었지만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조근상과 필리핀 외딴 섬의 호텔에서 함께 묵고 있는 한승영 사이의 며칠 간의 궤적은 두 사람이 태풍으로 발이 묶인 탓이다.
「그림자를 위해 기도하라」
안희언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정이섭은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에서 한승영이 읽고 있던 책의 저자이고, 정이섭의 친구 황두성은 「북극인 김철」에서 김철이 구해낸 물에 빠진 사내에게 사기를 당한 처지이다. 소설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엮이고 있다.
「그들은 저 북극부엉이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 북극부엉이 오늘 밤도 저 세계의 가장 춥고 혹독한 어둠의 끝으로부터 날아와 여기 흰 벚꽃 흐드러지게 핀 한적한 동네의 어느 지붕에인가 앉아서 울고 있구나. 은상길은 낡은 침대 위에 천장을 마주보고 드러누워 그러한 상념들에 젖어 있었다... 2년 남짓 전 어느 날, 상길은 구두와 양말을 한강철교 도로변에 가지런히 벗어둔 채 교각 모서리에 설치된 ‘위로의 전화기’ 수화기를 붙들고 언뜻 전위시 낭송처럼 들릴 법한 하소연을 한참 지껄이는 중이었다...” 물에 빠진 사내가 은상길이 되는 소설...
「전갈(Scorpion)의 전문(電文)」
인간에게 한 쪽 눈을 잃은 고양이와 의수인 왼손을 가지고 있는 해선... “... 딜레마. 신을 믿자니 혁명가가 못 되고, 신을 부정하자니 혁명이 안 되고, 당연히 문제의 핵심은 강해선 그녀 자신이었지만, 그것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천 년에 한 번씩 황당무계하게 탈바꿈하는 시대에 딱 걸려버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착각의 감옥.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수렁. 이것은 절대로 종식되지 않을 일상적인 난세였다...” (p.202)
「떠나는 그 순간부터 기억되는 일」
신적과 은파와 보르헤스와 한쪽 눈이 없는 고양이와 망고의 씨...
「옛사람」
“... 아직은 소년일 수밖에 없던 그와 나의 간절한 소망. 우리는 마지막 단어가 열려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가령, 인생의 머리맡에 고통·실연·핍박·처참·비정·슬픔·배신·후회·굴욕·이별·허무·증오·질투·원망·상실·외로움·저주 따위의 낱말들이 차례로 늘어선다 하여도, 그 끝자리 만큼은 늘 희망의 어휘로 마감되길 원했던 것이다...” (p.217) 내 어릴 적 친구 박정호가 에로 배우 강혜성이 되어 나타나는 혹은 나타났다고 믿게 되는 그런 때...
이응준 / 소년을 위한 사랑의 해석 / 문학과지성사 / 277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