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 허스트베트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눈이 가려진 채로도 지적이고 에로틱하게 통과해내는 어떤 청춘...

by 우주에부는바람

이런 소설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러니까 연애 내지는 사랑 이야기인데 시간을 거슬러가며 서술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제 막 연애가 끝난 직후 혹은 연애가 끝난 이후의 시간에서 소설을 시작하고, 이어서 소설은 연애의 절정기로 이어지며, 그러고 나서 연애가 무르익는 시기로 이동하였다가 이제 막 연애가 시작되는 어떤 순간에서 끝을 맺는다. 나는 이러한 역순의 형식이 사랑이나 연애를 더 잘 보이도록 만들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나야 항상 자기를 사랑했지... 그가 말했다... 다만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야.” (p.86)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은 폴 오스터의 아내이면서 (내 생각일 뿐이지만) 폴 오스터보다 훨씬 지적인 글을 쓴다고 여겨지는 시리 허스트베트의 첫 번째 소설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전 상상하였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설 속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모닝 씨, 스티븐, 로즈 교수를 주인공인 아이리스 베건은 실제로는 로즈 교수, 스티븐, 모닝 씨의 순서로 만나는 것이다.


“클라우스는 바에서 태어났다. 아무튼 내 클라우스는 그렇다. 잔인한 아이는 내 안에서 두 번째 형태를 갖게 되었고, 그 아이의 이름을 취하는 순간 앞으로의 밤은 클라우스의 것이라고 깨달았다. 사실 클라우스가 내 곁에 얼쩡거린 지는 한참 되었다. 거짓말은 일종의 진실, 일종의 출생신고였다...” (p.248)


물론 그런 만남의 역순으로의 서술 그 자체가 뭔가 의미를 가지는 소설은 아니다. 모닝 씨로부터 일을 의뢰받은 현재로부터 시작된 소설은 그 직전 헤어진 스티븐(과 조지)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다시 스티븐과의 헤어짐 이후의 정신병원으로 이동하였다가, 오래전 모닝 씨와 스티븐 이전에 이루어진 로즈 교수와의 첫만남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소설은 이들 모두의 만남을 뒤로 한 채 비평가인 패리스에게서 마무리된다.


『“저는 선善이나 진眞이라는 관념은 융통성 따위가 전혀 없이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해체될 거예요.”

그가 나를 보았다.

“미덕과 진실을 혼동해서는 안 돼. 그 둘은 몹시 다르거든.”

그 말이 뇌리에 새겨지자 내가 저지른 실수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미덕은 진실과 무관한 윤리적 자질이지.” 그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악이 진실이 될 수 있군요.”

“물론이지.”』 (p.290)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간의 진행은 오히려 이십대 초반, 격정적인 한 때를 보내는 주인공 아이리스 베건의 혼란스러운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효과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소설에서 더욱 중요해 보이는 것은, 클라우스, 내가 번역하던 책 속 주인공으로부터 끄집어낸 또 다른 인격의 실제적 도용이다. 이것은 이후 소설의 앞부분 모닝 씨 앞에서 내가 나의 본명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알리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러니까 뒤섞인 시간 속에서도...) 지적이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나약해 보이지만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강인한, 모호함 속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는 여인의 청춘의 한 때가 오락가락 하는 시간 속에서도 꽤나 명확하게 서술되고 있다.


소설의 원제는 The Blindfold 이고, 이는 눈가리개라는 뜻인데, 소설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그러니까 나와 로즈 교수의 사랑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이 눈가리개가 등장한다. 눈을 감은 채로도 집에 갈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나의 눈을 로즈 교수는 방금 선물한 스카프로 가려버리고 나는 그 상태로 걷는다. 소설은 이렇게 눈이 가려진 채 (호언장담 속에) 청춘을 통과해내는 나를 (악간의 치기에도 불구하고) 지적이고도 에로틱하게 바라본다.



시리 허스트베트 Siri Hustvedt / 김선형 역 / 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The Blindfold) / 뮤진트리 / 347쪽 / 2017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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