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별 이야기들이 묘한 유머 코드가 내장되어 있는 문장들에 실려서...
높낮이가 없는 음성으로, 별다른 감정의 동요도 없이, 별의별 말 같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상황과 밋밋하기만 한 인물들을 다루는 것만 같은 소설들이다. 그렇지만 소설들에는 (그리고 문체에는) 묘한 유머 코드가 내장되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뉘앙스에 근접해 있다. 또래의 젊은 작가들 중 유니크하다. 황당무계와 소설적 상상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데, 용케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혹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이동 중이다, 라고 생각해본다.
「레바논의 밤」
“... 그것은 우스갯소리 같기도 하고 우주적인 메시지가 담긴 아포리즘 같기도 했다. 뜻을 명확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장은 이야기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그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되리라고 했다...” (pp.15~16) 나와 장과 연희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소설의 맨 앞장에, 요세프 도브로프스키(실존하는 인물이다. 18세기 체코의 작가이다.)가 쓴 『침묵과 사물』(실재하는 책인지 알 수 없다.)에 나오는 베이루트의 현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도서관과 시체와 세 사람 사이의 인과 관계를 필두로 한 건조한 우화...
「애호가들」
“... 그는 그러다가 책을 한권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로뻬 데 베가의 『과수원지기의 개』였는데 꽤 오래전에 내가 번역한 책이었다...” (p.56) 나는 얼른 검색을 했다. 로뻬 데 베가는 스페인의 극작가다. 실존 인물이다. 『과수원지기의 개』 또한 지금 판매되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구매하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사거나 본 책들이 많다. 예를 든다면 허영만의 만화를 보고 산 로뜨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같은...) 그건 그렇고 소설은 대학 강사인 나의 운수 나쁜 한 때를 그리고 있다.
「하나의 미래」
“그녀가 말한 모임은 ‘바르샤바 낭독회’라는 이름이었는데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뿐더러 그다지 제대로 된 모임도 아닌 것 같았다. 정기적으로 모이기는 하는데 정해진 맴버는 없다고 했다. 주최자가 선정한 희곡 작품을 그때그때 시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역할을 나눈 뒤 읽고 헤어지는 모임이었다...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면 할 이야기를 찾고 억지로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잖아. 우리는 그저 정해진 대본을 읽는 거야. 이야깃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 없이 몇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거지. 나쁘지 않잖아?” (p.66) 이 낭독회 재미있겠다, 는 마음이 가장 오래 남았다. 나와 주이와 오하나와 졸피뎀과 자낙스와 많은 희곡의 제목들이 등장한다.
「여름의 궤적」
“... 내가 알아낸 사실은 인드리코테리움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동물 중 가장 큰 몸집을 지닌 육상 동물이라는 것과, 신생대 아시아 지역에 살아다는 것 정도였다...” (p.105) 나는 또 얼른 인드리코테리움이라는 동물을 검색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현재는 인드로코테리움이라는 학명 대신 파라케라테리움을 사용한다. 어쨌든 육상에서 가장 큰 포유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파충류 아니고...) 일본에서 만난 전 부인 선영의 이야기와 그곳에서 가르치는 여학생 중 한 명, 그리고 온통 자연사박물관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소설이다.
「음악의 즐거움」
『... 그린데이가 데뷔 앨범인 《두키》를 내고 천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세계적으로 네오펑크의 붐을 일으켰을 때 《롤링 스톤》지의 기자가 그룹의 리더인 빌리 조에게 도대체 펑크란 무엇인지 질문했다. 빌리는 옆에 놓인 쓰레기통을 걷어차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게 펑크입니다.” 기자는 빌 리가 쓰러뜨려놓은 쓰레기통을 걷어차면서 “이게 펑크라고요?”라고 물었는데, 빌리는 “아니요, 그건 그냥 유행을 따르는 거죠”라고 대답했다...』 (pp.120~121) 전립선암과 록큰롤과 시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름 발견되는 것이 있다.
「특히나 영원에 가까운 것들」
외할아버지의 죽음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소설, 이라고 하면 완전 거짓말이고, 지루하고 지루한 삶, 의 지루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찾아간 우정희라는 노인과의 만남 보다는 내가 일하고 있는 공장, 생산성을 위하여 침묵이 강요되는 공장,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일하는 동안 내가 그리스 비극을 암기해야 했던 공장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북방계 호랑이의 행동반경」
“하루는 집에 돌아와서 라면을 끓여 먹고 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고 나는 복직은 어렵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영은 밤이어서 그런지 내가 불쌍해서 그런지 요즘 잘 지내느냐고 물었고 나는 굳이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하고 다니느냐고 했다...” (p.173) 바로 이 정신 나간 일이라는 것은 동물원을 탈출한 호랑이 로스토프를 찾으러 다니는 일이다. 그 일에는 나 그리고 큐레이터와 사귀기 위해 호랑이를 잡아야 하는 친구 필수 그리고 고양이 탐정이 함께 한다.
「지평선에 닿기」
서지연과 서주연에 대한 서지연의 이야기 그리고 나와 형의 이야기가 놓여져 있다. 다자이오사무의 『인간 실격』, 외젠 이오네스꼬의 『외로운 남자』, 타까하시 겐이찌로오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솔제니찐의 『수용소 군도』,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아베 코오보오의 『모래의 여자』와 같은 소설들을 독서취향으로 삼고 있는 서지연과 나, 이어서 일단 정감이 갔는데, 그 정감이 그대로 황당한 과거와 암울한 현재의 사건들로 이어져서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거슬리는 것은 창비의 외래어 표기법...
정영수 / 애호가들 / 창비 / 230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