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둘도 없는 이야기를 알고 있는 오직 두 사람, 작가와 독자에 대한
「오직 두 사람」
“... 둘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이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일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둘, 최후의 두 사람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의절을 해요. 그러곤 수십 년 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결국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요.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 (pp.11~12) 세상 사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단 두 사람의 관계, 두 사람은 세상에서 유일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두 사람일 수도 있고, 여기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관계로 비춰지는 아빠 그리고 아빠 딸이라고 불릴만한 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남은 사람의 심경이란 어떤 모양일까, 라는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아이를 찾습니다」
2014년 겨울에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 발표되었다...
행복해 보였던 젊은 부부가 어느 날 아이를 잃어버렸다. 아내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고 남편은 그사이 직장을 그만두었고 날품팔이를 하며 아이를 찾기 위한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십수 년이 지나 그 아이를 찾았다. 아이는 자신이 유괴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엄마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아이를 잃은 부부, 정신병에 걸린 아내를 돌봐야 하는 남편, 친엄마라고 생각하던 여인의 자살을 겪은 아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 별안간 나타난 친부모가 어색할 뿐인 아이, 이 모든 것을 떠안아야 하는 남편... 모든 상황이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의 심장을 옥죈다.
「인생의 원점」
“... 서진에게는 인아가 회귀할 원점이었으나 인아에게 서진은 인생이라는 힘겨운 등산길에서 만나게 되는 대피소와 같은 것이 아닐까. 원점과 달리 대피소는 당장은 눈물나게 고마울지 몰라도 언제든지 새로 만날 수 있다. 서진은 인아에게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pp.92~93) 결국 서진은 인아의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어쩌면 인아가 만난 대피소였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인아를 때리는 인아의 남편, 그런 남편으로부터 속수무책이었던 인아가 선택한 그 혹은 그들, 그리고 이제 인아도 인아의 남편도 그리고 그와 비슷하거나 다른 그들 모두가 죽거나 죽음 직전이거나 사라진 마당에 나만 ‘원점’에 다시 서게 된다.
「옥수수와 나」
김영하는 이 작품으로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그때 작성한 약간의 리뷰이다...
김영하는 지난 해인 2011년 초 작가론 혹은 예술론에 대한 일련의 논쟁 끝에 트위터와 블로그와 같은 온라인 생활을 접고 글쓰기에만 전념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결과물로 우리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 막상 쓰기 시작하자 신비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현상입니다만 작품이 작가 자신을 배반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저 작품이 저 자신을 초월해, 저의 비천한 문재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저 홀로 놀라운 지경으로 가버린 겁니다...” 자신을 옥수수라고 믿는 어느 정신병자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소설은 소설가인 내가 편집자인 전처와 전처의 출판사 사장에게 등 떠밀려 뉴욕으로 날아가고, 그곳에서 사장의 아내와 한 집에 기거하며 소설을 쓰는 이야기이다. 김영하 특유의 펄떡거리는 듯한 스토리 라인이 돋보이며, 그러한 뼈대에 튼실하게 붙어 있는 생선살의 맛도 훌륭하다. “... 이봐 너구리. 내가 등장인물일 뿐이라고? 무슨 소리!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라는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책의 저자였어.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누구도 출판해주지 않을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지. 내가 종속변수라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내가 바로 저자이고 일인칭 시점 화자이고 이야기의 종결자야. 너나 네 마누라가 아니라 내가 죽어야 끝나는 거지. 그래야 마지막에 ‘끝’이라고 쓸 수 있는 거라고.” 작가와 사회의 관계 보다는 작가 자체 그리고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는 김영하는 (나는 이런 김영하의 경향에 반대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경향을 소설로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김영하의 경향에 반대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경향을 소설가인 그가 이처럼 소설로 발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찬성한다) 본다.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옥수수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닭들은 그가 옥수수가 아님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작가가 아무리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고 혼잣말을 하여도...
「슈트」
“좀 바보 같은 말처럼 들릴 수는 이는데...... 두 사람, 피터의 양복을 입어보는 게 어때요? 피터가 오래전에, 아마 십 년도 더 전에 맞췄을지 모르는 옷인데, 그걸 입어보고 더 잘 맞는 사람이 일단 유골을 가져가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한국에 돌아가 유전자 검사를 해요.” (p.188) 오래전 사라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죽고, 그 아버지와 함께 살던 여자가 탐정에게 의뢰하여 지훈을 찾았다. 지훈은 뉴욕으로 왔고, 여자에게서 유골을 받아들려고 하는 찰나, 한국으로부터 날아온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탐정이 너무 열심히 혹은 너무 게으르게 일을 한 셈인데, 어쨌든 꽤나 난감한 상황이다. 하지만 흥미롭다. 좀더 길게 끌고 가도 좋았을 소설이 아닐까.
「최은지와 박인수」
‘위선이여, 안녕.’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데, 이것을 반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잠시 헷갈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설 내내 사장인 나와 최은지가 나눈 모든 이야기들이 모두 헛소리어야 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어느 날 사장실에 들어와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리는 미혼의 직원인 최은지, 그리고 동료로 만나 적이 되어다가 어느 순간 친구도 돌아선 그러나 이제 암으로 병실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박인수... 둘 사이를 왕래하며 풀어내는 출판사 사장인 나의, 어떤 점이 그렇다면 위선이었다고 해야 할까. 좋은 사장 좋은 친구 좋은 남편, 어느 시점에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 했나, 라고 뇌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내게도 낯설지 않다.
「신의 장난」
취업의 관문을 통과하고 연수의 절차에 들어가게 된 줄 알았던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로 이루어진 네 명은 어느 장소에 갇히게 된다. 그곳에서 고구마로 연명하며 그것이 방 탈출 게임의 일환인지, 그 전과정이 취업의 어떤 관문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잠시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곳을 해석하고 그곳을 견뎌내거나 그곳의 탈출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영하 / 오직 두 사람 / 문학동네 / 271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