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실제의 조합으로 발랄한 창조를 꾀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야기의 태동은 어째서 랄프 로렌의 아이템 라인에는 시계가 없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랄프 로렌 시계가 있다. 가격도 비싸다. 200만원을 상회하는 것도 검색이 된다. 곧이어 책에 대한 소개글을 검색한다. 작가의 어린 동생이 고등학생 시절 엄마에게 랄프 로렌 코트를 사달라고 조르던 장면으로부터 소설은 잉태되었음을 확인한다.
“... 그 당시의 나는 랄프 로렌과 관련된 자료들이 언제나 내 손에 닿는 곳에 있기를 병적으로 바랐고, 마치 그게 나의 직업인 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랄프 로렌에 대한 온갖 자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자료에 파묻히면 파묻힐수록 랄프 로렌은 그저 비밀 속으로 사그라져버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글을 끊임없이 읽어댔다...” (pp.91~92)
소설의 주인공인 종수는 지도 교수인 기쿠 박사로부터 휴학을 권고 받는다. 박사의 연구실로부터의 퇴출 선고인 셈이다. 대학원생으로 미국 생활을 유지하던 나는 좌절감에 여러 날 술을 마신다. 그러던 중 책상 서랍에서 학창 시절의 친구인 수영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짐을 꾸려 나온 거리에서 거대한 랄프 로렌 매장을 발견한다.
“... 조셉 프랭클은 시계방을 사십여 년이나 운영했다. 평생 독신이었고,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또한 ‘형편없는’ 권투선수였다. 이외에는 제대로 알 수 있는 사실이 거의 없었다...” (p.131)
종수는 수영을 떠올리고 수영은 랄프 로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랄프 로렌에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돌고 돌아 현존하는 유명 디자이너인 랄프 로렌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 그 시절의 랄프 로렌을 거두었던 조셉 프랭클이라는 인물에 도달한다. 나는 랄프 로렌을 잘 알기 위해서 조셉 프랭클을 알고자 하고, 조셉 프랭클을 알기 위하여 잭슨 여사를 찾아가고 잭슨 여사를 찾아갔다가 입주 간호사인 섀넌 헤이스와 가까워진다.
“섀넌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 채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잡지 때문에 그다지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유대인 양부모가 있지도 않다. 나는 작가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내가 원한 딱 한 가지는 섀넌이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해주는 것이었다...” (p.269)
하지만 랄프 로렌이라는 인물, 실존하는 디자이너라는 그의 직업과 그가 창조하고 성장시킨 브랜드라는 실재를 제외하면 소설 속의 대부분의 것들은 허구의 산물이다. 랄프 로렌은 여전히 생존해 있고 그의 어린 시절도 알려져 있지만 소설 속의 랄프 로렌은 이미 사망하였고 그의 이력 군데군데가 비어 있다. 실존하는 인물의 허구의 비어 있는 이력을 채우기 위하여 소설의 주인공 종수는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의 말이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
소설 속 헨리 카터, 조셉 프랭클에게 케이오를 당한 적이 있는 조셉 카터의 후손인 헨리 카터가 한 말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구술되고 있는 말들이 만들어낸 기억으로(만) 소설은 존재한다. 허구와 실제의 조합으로 발랄한 창조를 꾀하고 있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절묘하게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은데, 그 많음이 오히려 소설 속 허구가 허구 이상의 것으로 나아갈 때 휘청거리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손보미 / 디어 랄프 로렌 (Dear Ralph Lauren) / 문학동네 / 357쪽 / 2017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