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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장석주 《마흔의 서재》

진짜 소통의 안에서 소소한 행복감으로 살고 싶은데...

  출판사를 바꿔 출판되기 이전 《마흔의 서재》는 2012년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라면 나의 나이가 마흔세 살이고, 그때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책에 실린 글을 읽지 않았을까 넘겨 짚어본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더 흘렀고, 나는 조금 띄엄띄엄 글을 읽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는데, 그런데 그게 너무 알겠어서, 덜 와닿는다고 하면 말이 될까. 십여 년 더 나이를 먹었더니,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좀더 하게 되고 말았다. 


  “문제는 과다한 노동과 성과가 결국은 자기 착취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들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한병철의 통찰은 날카롭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과잉노동을 하며 자기 착취를 한다는 것이다.” (p.45)


  그러니까 한병철의 《피로사회》만 해도 그렇다. 당시의 나는 ’외부의 강제‘ 없이 알아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성과주체‘라는 개념에 꽤나 혹하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정말 ’외부의 강제‘가 없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퍼뜩 먼저 들었다. 나는 정말 성과’주체‘라는 말에 합당할만큼 주체적인가, 나는 정말 외부의 강제 없이 ’알아서‘ 가해자가 되었는가.


  “불행한 사람의 특징은 그냥 불행한 것이 아니라 몹시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심장이 두근대는 행복한 순간을 꽉 틀어쥐고 제 것으로 붙잡지 못하고 흘려보낸다. 행복은 팡파레를 울리며 거창하게 다가오는 줄만 안다. 행복은 슬그머니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행복한 순간들은 쉽게 놓치는 사람들이 걱정거리들은 어디로 도망갈까 두려운 듯 꽉 움켜쥔다.그리고 자아를 세상과 불화하게 방치하면서 세상에 자기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하소연한다.” (p.49)


  하루키가 자신의 에세이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소확행‘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한 것이 1986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 이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널리 확산되었다. 작가는 그보다 조금 앞서 이미 소소한 행복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하긴 실린 글들을 쓴 것이 작가가 금광호수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짓고 기거할 때로 짐작되는 바, 몸소 ’소확행‘을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으리라.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의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책 읽기란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가는 행위다. 책을 읽는 행위는 혁신적인 사유를 촉발시키고 우리의 가능성을 확장하며 우리를 새로운 어떤 세계로 데려가는 일이다.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간다.” (p.113)


  나는 책을 읽는 일을 수집가의 마음으로 한다. 별다른 사용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집가들이 수집품에 열광하는 것은 그 수집품에 얽힌 히스토리에 그 수집품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까지 덧입혀지기 때문이다. 장식장의 작은 피규어 하나에도 이런 거창한 시선을 주기 충분하다면,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의 전 생애 혹은 생의 빛나는 한 부분이 고스란히 담겨진 책 한 권에 열광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함께 살고, 사랑하고, 존재해야 하는 존재이다. 혼자 굴을 파고 그 속에 숨어 고립해서 살 수는 없다. 잘 산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잘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통하면서 상호 간에 공감과 이해를 넓혀야 하고 상호 호혜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소통은 우리가 함께 나란히 살기 위해서, 혹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가치이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진짜로 소통하라. 소통은 생명의 요청이고 명령일 뿐만 아니라 인생 최고의 예술이다.” (pp.238~239)


  이제 작가는 ’수졸재‘에 살지 않는다. 세상에 좀더 가깝게(?) 살고 있다. 한 번도 세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 들어가고 나옴 모두가 부럽다. 실은 얼마전 메모장에 ’공감하지 못하면 배려할 수 없고, 배려하지 않는 자에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고 썼다. 진짜 소통이라는 것 안에는 사랑도, 공감도, 배려도, 예의도, 행복도 모두 들어 있다.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장석주 / 마흔의 서재 / 프시케의숲 / 322쪽 / 202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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