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 불가능한 상실의 시간, 그 끝과 시작 혹은 시작과 끝...
내가 겪은 아주 가까운 사적인 죽음은, 아직까지는 할머니의 죽음 한 건 뿐이다. 당시 나는 단기사병으로 복무 중이었고, 할머니의 죽음은 내게 며칠간의 휴가를 건넸다. 시골의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신지 일 년 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지 삼 개월쯤이 흐른 뒤였다. 할머니는 추석 전날 돌아가셨고, 방문객들을 고려하여 오일장을 치러야 했다. 당시의 여자 친구가 장례식장을 찾았고, 나는 그녀와 함께 근처의 만화 가게에서 짧은 데이트를 즐겼다.
시종일관 영화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천연색의 영화이지만 그 영화의 색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바닷가 작은 마을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실제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에섹스 카운티에 위치한 인구 1만 명의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 겨울에는 생기가 없다. 그것은 영화 속 리가 현재 일하고 있는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색을 없앤 것은 공간이 아니라 리라는 인물이다.
‘I can't beat it.’
영화의 중간까지 우리는 리라는 인물에 대해 알 수가 없다. 무기력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폭발해버리는 그에게 어떤 과거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리가 눈을 치우던 삽을 자리에 놓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향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형이 죽은 다음 병원에 도착하고 망설임 끝에 죽은 형의 시체에 입 맞춘다. 그리고 형의 아들, 패트릭이 남아 있다.
패트릭의 후견인으로 지정된 리는 난감해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리는 어린 조카 패트릭과 형이 모는 어선에서 장난치고 있다. 리는 패트릭을 사랑하였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다른 이에게 패트릭의 후견인을 양도하려다 패트릭의 눈총을 받기까지 한다. 아버지를 잃은 패트릭 또한 담담하다. (조의 병은 오래된 것이었으며 사실 가족들은 그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리보다 더욱 짧은 시간 죽은 아버지를 조우하였을 뿐이고, 십대 소년답게 여자 친구들과의 섹스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인다.
‘I can't beat it.’
하지만 어느 순간, 리의 과거의 사건들이 회상되는 순간, 패트릭이 냉동고의 닭고기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 리의 전 부인인 랜디가 유모차에 실려 있는 아이를 두고 리에게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패트릭이 아버지의 시신을 냉동고에 보관해야 한다는 사실을 참아내지 못하는 순간, 무기력하게 영화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인해 불안해하던 마음이 폭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리를 사로잡고 있던 오래된 상실의 시간들을 (리는 새벽까지 어울리던 친구들이 떠난 집에, 벽난로의 불을 지핀 후에, 술을 사러갔다. 먼 길을 갔다가 왔을 때 그의 집에는 불이 났고, 리의 세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나 몰라라 할 수 없게 되고, 어쩌면 앞으로 패트릭이 겪어야 할 상실의 시간들을 (오래전 가족을 떠난 엄마와 패트릭은 다시 만나지만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질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어림짐작하게 된다.
‘I can't beat it.’
헤아려보니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삼십 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도처에 죽음이 어른거린다. 부모님은 모두 칠십대 중반을 넘겼다. 장모님도 이제 칠십대 중반이다. 두 마리의 고양이도 함께 생활한지 십여 년을 훌쩍 넘겼다. 오늘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는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에 대하여 말했다. 그런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서 이겨낼 수 있을까, 그것은 어쨌든 오직 한 번뿐인 죽음인데...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 케네스 로너건 감독 / 케이시 애플렉, 미셸 윌리엄스, 카일 챈들러 출연 / 137분 / 2017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