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 마사하루 감독 안도 사쿠라 출연 <백엔의 사랑>

패자인 나와 승자인 내가 서로의 등을 두드리는 것 같은...

by 우주에부는바람

몇 번 볼까말까 망설이던 영화였는데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주말, 소파에 녹아내리듯 누워있으면서 드디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 나서도 초반에는 집중을 하지 못하여 몇 차례 주방을 들락거리기도 하였다. 서른을 넘은 나이에도 도시락 가게를 운영하는 노모의 집에 얹혀 사는 이치코의 구부정한 어깨에서 강하게 풍기는 루저의 냄새가 강렬하기도 하여서 오래 전의 나를 소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십대의 중후반부, 그리고 결혼을 한 다음인 삼십대 초반까지 나 또한 영화 속 이치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노모의 자리에 아내가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 나는 전날 마신 술이 다그치는 숙취에 찌든 몸과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영화에서처럼 주먹다짐할 동생이 없었고, 함께 게임을 할 조카만 없었을 뿐 담배를 물고 헐렁한 추리닝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렇게 나는 소환된 기억을 두툼하게 깔고 앉아 영화를 보았다.


이치코는 어느 날 동생과 드잡이를 한 후에 가족들이 함께 하는 집에서 독립을 한다. 물론 독립의 자금 또한 노모에게서 나온 것이니 독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리고 동네 백엔샵에 취업을 하는데, 거거에는 또 크게 나을 것 없는 인물들이 한가득이다. 본사에서 나온 직원은 끊임없이 투덜대고, 동료 직원은 끊임없이 주절거리며 이치코를 건든다. 여기에 기간이 오버된 식품을 훔쳐가는 할머니 노숙자와 매번 하나에 백엔짜리 바나나를 구매하는(구매해놓고 카운터에 바나나를 놓고가기 일쑤인) 나이든 복서가 구색을 맞춘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치코와 그 주변 인물들의 포진이다.



하지만 카노가 건넨 초대장을 가지고 구경하게 된 복싱 대회 이후 이치코에게 변화의 조짐이 생기기 시작한다. 자신을 강간한 동료 직원을 신고하고 카노와 함께 동거 비슷한 것을 하게 되고 다시 그 카노를 두부 장사 처녀에게 빼앗기는 루저의 일상다반사 속에서도 이치코는 복싱 연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이치코는 서른 두 살이 마지노선인 프로테스트에 합격하고 4전 녹다운 전승의 캐리어를 가진 선수와 데뷔전까지 치르게 된다.



영화는 바로 이 후반부가 압권이다. 루저의 일상을 쫓아가면서 처질대로 처진 마음을 순식간에 다른 시간과 공간 그러니까 다른 차원으로 옮겨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백이십 퍼센트, 이치코를 연기한 안도 사쿠라의 공이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소극적 인간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영화 전반부의 이치코와 복싱을 하면서 빠르게 스텝을 밟는 영화 후반부의 이치코는 절대 같은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안도 사쿠라가 연기한 이치코의 변신이 떠올라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지만 굽은 등으로 돌아다니고 배를 얻어 맞으며 정신을 잃고 강간을 당하는 이치코도 이치코이고, 라운드 내내 맞고 쓰러져도 꿋꿋하게 일어나 패배를 받아들이는 이치코도 이치코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패배 끝에 승자와 끌어 안고 고맙다 말하는 이치코에게, 터벅터벅 체육관의 계단을 내려가며 카노에게 안겨 울면서 이기고 싶었다고 말하는 이치코에게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고 만다.




백엔의 사랑 / 타케 마사하루 감독 / 안도 사쿠라 출연 / 113분 / 2016 (2016)



ps.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에서의 안도 사쿠라의 연기도 훌륭하였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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