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 《포트노이의 불평》

내부자의 시선을 버리지 않고 내부를 바라보며 내뱉는 적나라한 수다...

by 우주에부는바람

아래의 내용은 소설이 시작되기에 앞서 등장하는 포트노이증이라는 병증에 대한 설명이다.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라고 생각되는 단어이고, 설명도 그럴싸하다. 슈필포겔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직접 붙여놓은 설명도 있고, 그 설명이 실린 논문의 넘버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믿지 못할 것이 없다. 이 병증의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혹은 의사 슈필포겔에게 포획된 환자라고도 할 수 있는 앨릭젠더 포트노이까지 버젓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앨릭젠더 포트노이와 필립 로스가 태어난 해가 같네...


포트노이증症 Portnoy's Complaint : (앨릭젠더 포트노이(1933~ )의 이름을 딴 병명) 강력한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들이 종종 도착적 성격을 띠는 극도의 성적 갈망과 갈등을 일으키는 질환. 슈필포겔은 이렇게 설명한다. “노출증, 관음증, 페티시즘, 자기색정, 구강성교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환자의 ‘도덕성’ 때문에 공상도 행위도 진정한 성적 만족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강렬한 수치감과 더불어 응징, 특히 거세 형태의 응징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다.”(Spielvogel, O. “The Puzzled Penis,” Internationale Zeitshrift fur Psychoanalyse, Vol. XXIV p. 909.) 슈필포겔은 이 증상들 가운데 다수는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널리 나타나는 결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소설은 무지하게 수다스럽다. 그것도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자신의 (그러니까 앨릭스, 포트노이증의 연원에 거론되고 있는 앨릭젠더 포트노이의) 어린 시절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토로하는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슈필포겔이다. 하지만 슈필포겔이 소설에 전면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슈필포겔은 소설을 적는 노트같은 것이다 필립 로스는 포트노이의 입을 빌려, 혹은 손을 빌려 슈필포겔이라는 노트에 수다를 털어 낸다.


“... 나는 만날 불평만 합니다. 혐오감이 바닥을 모르는 것 같아요. 나한테는 이만하면 됐다라는 게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이 제의祭儀를 거치듯 불평불만에 탐닉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게 사실일까요, 아니면 그냥 단순한 불평일까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불평이 진실의 한 형태인 걸까요? 어쨌거나 내 양심은 내 불평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그 당시의 내 진짜 소년 시절은 지금 내가 이렇게 낯설게 느끼고 원한을 품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이 알리고 싶어합니다. 돌이켜보면 엄청나게 혼란스러웠고 내면의 갈등이 깊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다른 집에서 다른 사람들과 살기를 바라는 그런 아이였던 기억은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걸 갈망했는지는 몰라도요...” (pp.139~140)


이미 말했듯 주인공인 앨릭스는 필립 로스와 태어난 해가 같고, 또한 필립 로스처럼 유대인이다. (필립 로스의 대부분의 소설의 주인공은 유대인이고, 그 배경 또한 유대인 사회이다, 그리고 미국이다. 미국이라는 사회에 오래전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WASP, 미국 사회의 주류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유대인을 통해 필립 로스는 미국을 마구 파헤친다.) 이러한 주인공과 작가의 싱크로율은 순수하다 못해 적나라한 소설의 디테일한 내용들로 인해 더욱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선생님, 다른 환자들은 꿈을 꿀지 모르지만 - 나한테는 모든 일이 진짜로 일어납니다. 내 인생은 잠재내용潛在內容이 없는 인생이에요. 꿈에 나올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까요! 선생님, 이스라엘에서는 나의 그게 서지 않았어요! 보세요, 그건 상징으로 볼 때 어떤 거죠? 어디 누가 이보다 대단한 걸 보여주나봅시다, 행동화行動化로 말이에요!...” (p.377)


잘 알지 못하는 유대인 혹은 유대인 가정 그리고 유대인 사회를 소설을 통해 어렴풋하게 그려본다. ‘부모가 살아 있는 유대인 남자는 열다섯 살 난 애예요. 부모가 죽기 전에는 계속 열다섯 살 난 애라고요!’라는 앨릭스의 외침은 (사실 그의 다른 소설들, 특히나 2008년 작품인 《울분》의 마커스 또한 거의 신경쇠약 직전의 유대인 남자 혹은 소년 혹은 청년으로 그려지고 있다.) 유대인 가족의 계율 같은 것, 유대인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것에 (어떤 선입관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희미한 형태를 부여하게 한다.


“... 나는 내가 ‘디아스포라 문화’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면의 전형이라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없이 보낸 그 수백 년에 걸친 세월이 나 같은 불쾌한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 겁 많고, 방어적이고, 자기 비하나 하고, 이방인 세계의 삶에 의해 거세되고 부패한 인간을요. 박해자들에 대항해 손 한 번 들어올리지 못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피로써 자신의 목숨을 방어하지도 못하고 가스실로 간 수백만 명이 바로 나 같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는 겁니다...” (pp.387~388)


디아스포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홀로코스트를 경험해야 했던 유대인, 그러한 근원을 가진 채 미국 사회에 현존하는 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카테고리를 부정하는 대신, 그 카테고리의 내부자인 입장을 견지한 채로, 유대인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 작가의 쉽지 않은 경로에 일단 경탄한다. 게다가 필립 로스는 그 길 위에서 미국을 바라보기까지 하였다.



필립 로스 Philip Roth / 정영목 역 / 포트노이의 불평 (Portnoy's Complaint) / 문학동네 / 407쪽 / 2014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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