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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8. 2024

김금희 《2017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몽롱하고 우울한 형상으로 애매하게 부유하는 지금 여기의 군상들...

  김금희 「체스의 모든 것」 

  “...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대화가 저렇듯 열띠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공허헌가 생각했다. 대체 체스가 뭐라고, 저렇게 싸우는가. 우리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것 잘하면 밥이 생기나, 장학금이 나오나. 하지만 그러면서도 선배가 마치 목격자가 필요한 것처럼 국화에게 가자고 하면 거절 못한 채 따라나섰다.” (p.21) 노아 선배와 국화의 오래전 일화, 그 중심에 있는 체스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처럼 공허하다. 룰이 있으나마나, 승자도 패자도 있으나마나 하였던 과거의 노아 선배와 국화가 몰두하였던 체스는 사라졌어도 삶은 남아 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두 사람은 나이가 들었고,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는 내가 있다. 

  김금희 「세실리아」

  대학 요트반에서 함께 하였던 세실리아, 그러나 그녀의 엉덩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같은 부서 활동을 했던 남자들, 시간이 흐르고 세실리아를 찾아가서 만나는 나는... 『세실리아는 표정이 좀 바뀐 채 뭔가를 생각했다. 기분이 상했다기보다는 내가 걔 얘기를 한 것이 단순한 사실의 전달인가, 의도가 있는가,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세실리아는 “결혼한 줄도 몰랐는걸, 나는.”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긴 침묵이었다. 나는 무슨 닭요릿집이 이렇게 멀까,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가. 우리집으로 가서 오늘의 일을 잊기까지는 또 얼마나 멀 것인가.』 이런 식의 느슨한 스산함을 마음에 들어 한다, 나는...

  권여선 「재」

  “... 아무 기댈 곳도 없고 아무 쥘 것도 남지 않은, 이제 와서야 그는 비로소 겉돌던 세상의 틀 속에 겨우 들어앉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회오리치던 그의 가르마를 누군가 단정히 잡아준 것만 같았다.” (p.86) 때로는 국숫집 쿠폰에 찍힌 붉은 스탬프를 바라보면서 깨닫게 되는 무언가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이 없다는, 그러니까 사람도 수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김애란 「건너편」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p.114) 노량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만난 이수와 도화... 그러나 이제 한 사람은 경찰 공무원이 되었고, 다른 사람은 여전히 겉돌고 있을 뿐이다. 함께 살고 있지만 거기에는 어떤 에너지가 이미 결여되어 있다. 

  안보윤 「때로는 아무것도」

  어쩌면 우리의 현재는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추레하고 희미한 채 흘러가는 것인지 모른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기조가 대체로 모두 그렇다. 빌라에 살고 있던 이웃들, 그리고 어떤 날의 사고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어차피 그들은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지금 소설 속 이곳에 도착해 있게끔 설계 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49. 이기호 / 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 (4,000원 - 그룹 1, 2에서 다섯 권 구매 시 무료 증정)” (p.148) 이기호의 시니컬한 유머의 세상에서는 소설가인 자기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중고 사이트에서 발견된 자신의 책에 대한 소개 문구는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소설의 주인공인 소설가는 그 문구의 주인을 찾아나선다.

  이장욱 「낙천성 연습」

  “물고기처럼 취한 밤이었다. 술집 밖으로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친구 녀석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나와주지 않았다. 그래, 이율배반 따위가 대체 뭐라는 말인가. 어차피 세상은 모순투성이고 모순조차 없으면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는 게 인생 아닌가...” (p.195) 안전제일주의자였다가 어느 순간 자살시도자로 바뀌었던 아버지를 둔 내가 풀어내는 탐구기이다. 

  조현 「제인 도우, 마이 보스」

  제인 도우, 라면 존 도우의 여성형, 그것일까... 진지한 음모론을 천연덕스럽게 진행시킨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상한 수집과 연구를 진행하는 글로벌한 단체가 있는데, 그 존재 이유가 강대국 지도자가 더 극심한 사고를 치지 않도록 일종의 취미 역할을 한다거나 하는...

  최정화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

  친구의 전시회에서 발견한 ‘푸른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장하는 그림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림 속 남자와 그림 바깥의 세상에서 발견되는 남자를 병치시키는 나의 증상은 점차 도를 넘어서게 된다.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김채원 「흐름 속으로」

  “그러고 보니 나무가 서로 떨어져서 서 있는 것, 그러나 가지를 뻗어 서로 잡으려 하는 - 이것이 신의 본질일까. 사람들에게 몸소 모습을 드러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신의 형상일까. 나무란 결국 내미는 손의 다른 형상인가.... 여기까지가 이 지상의 삶이다.” (p.281) 정과 연, 두 자매를 드러내는 특성의 연원에는 오래전 피난길에서의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었다. 김채원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박성원 「불안, 우울 그리고」

  “남자는 약간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어찌 이 많은 외계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화가 덜 풀린 표정으로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가 일어나자 발행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로 마주 앉은 연인이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한 여자는 이어폰에 달린 마이크에 대고 뭐라 중얼거리며 웃고 있었다.” (p.305) 그러니까 14년 만에 만난 아버지로부터 14년 전의 제조 날짜가 찍혀 있는 인형을 선물로 받은 그녀는 이제 발행인과 함께 자칭 외계인 연구자라는 사람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윤대녕 「경옥의 노래」

  오래전, 상욱의 친척인 재순을 통해 만난 적이 있던 경옥,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재순을 사이에 두고 제주에서 만났다. 재순이 떠나고도 며칠을 제주에서 더 지낸 두 사람은 이제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경옥은 상욱을 두고 자꾸 떠나려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렇게 자꾸만 떠나던 경옥은 아예 상욱을 떠나고, 상욱은 경옥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배낭에 넣고, 두 사람이 함께 한 장소를 찾아가 한 줌씩 뿌린다. 

  정이현 「서랍 속의 집」

  “그 여자의 태연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이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그러니까 전세값이 오르고 그 오른 전세값을 부담하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 이사를 한다면 동네를 바꾸거나 집의 평형을 바꿔 전세값에 맞추거나 아니면 집을 사거나... 끝없이 이어지는 이러한 이동의 행렬에 이제 발을 들이민 이 여인과 그 여인의 남편... 그리고 그렇게 고르고 고른 집에 숨겨진 쓰레기 더미와도 같은 사건 사고라니...


김금희, 권여선, 김애란, 안보윤, 이기호, 이장욱, 조현, 최정화, 김채원, 박성원, 윤대녕, 정이현 / 체스의 모든 것 : 2017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 현대문학 / 379쪽 / 20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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