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다미키 《하라 다미키 단편집》

지극히 개인적인 전쟁과 죽음의 매우 공적인 연대기로서의 소설...

by 우주에부는바람

오에 겐자부로는 2006년에 발간된 하라 다미키의 소설집 《여름 꽃 · 심원의 나라》의 해설에서 작가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대 일본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산문가의 한 사람” 이라고. 왠지 부럽다. 1951년에 이미 생을 마감한 작가의 책이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새롭게 발간되는 것도 (한국어판은 2006년에 간행된 소설집을 원문으로 하여 번역되었다), 그 발간에 부쳐 지금의 거장인 소설가가 해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대장간의 어두침침한 처마 아래에서 한 청년이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길가의 잡음에 그 소리는 금세 사라지고 말았는데, 저렇게 저 남자는 저기에 있는 것에 의혹을 가지지 않는 것 같다. 처마가 낮고 좁은 집은 바로 큰길에서 모기장의 등불이 그대로 들엳보인다. 저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고,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그러한 일이 그에게는 신기함 그 자체이고 희미한 감탄을 가져오게 했다. 하지만 큰길은 그의 심상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존재하고 있었고, 불빛이 번화한 거리 쪽으로 들어가자 거기로 자주 쇼핑하려 가는 아내는 여기를 잘 알고 있는 안내인처럼 서둘러 걸었다.” (p.8)


소설집에는 모두 열세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1부에는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여름」, 「가을 일기」, 「겨울 일기」, 「아름다운 죽음의 낭떠러지에」, 「죽음 속의 풍경」이 2부에는 「파멸의 서곡」, 「여름 꽃」, 「폐허에서」가 3부에는 「불의 입술」, 「진혼가」, 「영원한 푸르름」, 「심원의 나라」가 실려 있다. 소설은 1946년에서 1951년 사이에 발표된 것들이다. 이중 「심원의 나라」는 작가가 선로에 몸을 눕혀 자살하고 두 달이 지나 발표되었다.


“...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저 뼈항아리를 들고 기차를 타고 고향인 히로시마까지 갔다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쨌건 지금은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 보았다. 멍한 머리에 타인이 쓴 문장을 이해할 힘이 아직 남아 있는지 그것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눈앞에 펼치고 있는 것은 아나톨 프랑스의 단편집이었다. 읽고 있는 구절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의미는 읽는 바로 옆에서 사라져 가고,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는 자신의 세계가 공동이 되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pp.87~88)


1부에 실린 소설들은 아내의 병 그리고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 중이라는 시대적 암울함을 배경으로 하여 병에 걸린 아내와 아내를 돌보는 힘없는 남편이자 작가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요전에 3층에서 몸을 던진 여자가 있어요. 죽지 않으면 병이 낫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서...’ 라고 말하던 아내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 모든 과정이 소설이 되었다.


“잠시 지나자 토광 옆 닭장에서 두 마리의 어린 닭이 멋대로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직 보조가 맞지 않아 때로 준이치를 비롯한 식구들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닭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뜨거운 햇살이 목백일홍 위의 고요한 하늘에 넘쳐 나고 있었다... 원자폭탄이 이 도시를 찾아올 때까지는 아직 40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p.170)


2부에 실린 소설들은 아내의 죽음 이후 가족들이 있는 히로시마로 온 후의 작가에게 벌어진 일들이다. 1945년 8월 6일로부터 며칠 전을 그리고 있는 소설에서부터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는 그 순간이 담긴 소설 (작가는 실제로 그날 거기에 있었고, 소설에서처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원폭의 후유증에 직간접적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소설들이 2부에 실려 있다.


“... 당신들의 무수한 알려지지 않은 죽음은, 당신들의 무한한 슬픔은, 하늘에 닿은 것일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는 아직 그것을 전혀 알 수가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당신들의 무수한 죽음을 눈앞에서 보기 전에, 이미 그 1년 전에 하나의 죽음을 확실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죽음은 하늘에 닿았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것도 나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 하나의 슬픔이 나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pp.292~293)


1부와 2부의 소설들이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의 본토에서의 생활 그리고 원폭 투하로 인한 피해 당사자를 (오에 겐자부로가 칭찬했듯이)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되고 있다면 3부의 소설들은 모호한 관념의 내용을 포함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과의 처절한 사투를 그리고 있다. 심지어 마지막 소설 <심원의 나라>에는 유서라고 볼 수 있는 내용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1905년생으로 어쩌면 생의 대부분을 전쟁과 관련하여 보낸 작가, 그래서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었어야 할 작가의 글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아내의 죽음과 뒤이은 무수히 많은 자들의 죽음, 그 죽음들은 공적이면서 사적이고 사적이면서도 공적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죽음들은 결국 작가 자신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렇게 전쟁과 죽음의 연대기는 너와 우리를 거쳐 나에게로 와서 완성된다.



하라 다미키 原民喜 / 정향재 역 / 하라 다미키 단편집 (原民喜短篇集) / 지식을만드는지식 / 374쪽 / 2017 (1946~1951, 2016)



ps1. 책을 읽을 무렵 동네의 헌책방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 처음 들렀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책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 년여가 흐른 뒤였다. 그곳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번역본에 초판 1쇄라는 딱지와 함께 높은 가격이 매겨진 것을 보고 갸우뚱했다. 번역본인 책의 초판이라는 것이 여기의 내게 높은 가격을 요구할만한 의미가 있는 걸까, 싶었던 것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ps2. 시대가 흐르면 말도 글도 바뀐다. 그래서 나는 우리말로 씌어진 우리 소설들이 (책의 껍데기만 바꾸지 말고) 새로운 판본으로 만들어지는 작업이 계속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글이 작성된 당대의 언어로 읽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지금의 언어로 새롭게 읽어야 할 필요성이 더 커 보인다. 그리고 초판의 의미는 이럴 때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ps3. 책을 읽다가 문득 뒷표지를 보았고, 그곳에 찍혀 있는 가격에 놀랐다. 비록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는 하지만 판형도 큰 편이 아니고 하드 커버도 아닌데 무려.... 뭔가 이유가 있겠지...


ps4. 우연히 아내의 죽음으로 가득한 책 두 권을 연거푸 읽었다. 아내의 결혼 조건 중 하나는 자신보다 내가 늦게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 약속을 지킨다면, 언제가 되었든 내가 겪어야 할 일이다, 아내의 죽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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