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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김미옥 《미오기傳》

요령껏 스스로를 독려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도달할 수 있는...

  “나의 엄마는 혼자 생계를 짊어지고 모진 세상을 억세게 살았다. 그녀의 해방구는 욕설이었는데 노점상을 하거나 보따리 장사를 할 때도 손님과 싸움이 붙으면 거나한 욕설로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했다. 욕설의 내용을 보면 우선 상대방의 집안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이를테면 조상을 쌍놈이나 후레자식으로 만들어 가문에 먹칠을 했다. 그다음 인체의 신비를 이용해 구석구석 세심하게 기운을 뺐다. 쌔가 만발하고 눈까리가 썩어 문드러지며 대가리를 절구에 빻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동반자살을 노래하는 것이었는데 ‘오늘 너 죽고 나 죽자’였다.” (p.49)


  나의 엄마가 말하길, 잘못 했으면 나는 깡패의 아들이 되었을 수도 있단다. 엄마의 기억에 따르자면 상당한 규모(?)의 조직의 우두머리인 그와 엄마는 극장에서 첫 번째 데이트를 했다. 그는 아래 위 그리고 신발까지 하얀 색이었고 극장 입구에서는 동생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관객석 여기저기에 동생들이 있었고 엄마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엄마와 깡패의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클래식을 처음 만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녀원이 있었다. 나는 다람쥐처럼 나무를 잘 타서 수녀원 담장 위에 앉아 우물우물 버찌를 먹으며 수녀들의 노래를 들었다. 수녀가 되면 기도하고 노래만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p.91)


  그로부터 얼마 후 엄마는 편물 학원의 친구들과 함께 전라도의 어떤 산으로 소풍을 갔다. 그리고 군용 트럭에 타고 있던 (미래의 내 아버지인) 초급 장교의 선심으로 수월하게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엄마는 당시 아버지의 머리가 밤톨처럼 동글동글한 것이 그렇게 예뻤다며 나에게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잘 나가는 깡패가 아닌 가난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한 어린 군인을 선택한 것을 엄마는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당당하게 밥을 얻어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비겁한 나는 부자 친구가 사주는 밥은 주눅 든 얼굴로 얻어먹었다. 왜 가난한 자가 주는 밥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얻어먹었을까? 몇 배로 돌려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을까?” (pp.122~123)


  책에는 저자의 삶에 기여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로 가족들이 등장하고 때때로 친구가 등장하며 대부분의 글에 내가 빠지지 않는다. 책의 제목을 아예 ‘미오기傳’이라고 붙인 것도 그렇고,  읽고 난 뒤 구성해본 저자는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여기까지 왔다,의 느낌이 강하다. 특히나 ‘미오기’의 가족들은 어느 한 명 만만한 사람이 없다. 특히나 친가와 외가의 양쪽 할머니는 인생극장이라는 챕터 제목이 붙을만큼 희귀하다.


  “... 내가 두 할머니에게 배운 것은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절망도 없었다. 단지 힘이 들고 힘이 들지 않고의 차이였다. 두 할머니는 속으로 서로를 인정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두 여자 다 그 힘든 세상을 당차게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진주의 면서기는 강도귀달에게 여자이지만 귀신 두목처럼 남자를 호령하며 살리라는 주술을 걸었고, 밀양의 면서기는 조조간이 지아비 없어도 앞날을 내다보며 후손을 잘 키워내리란 주술을 걸었다. 그녀들의 공통점은 남자들의 세상에서 남성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p.155)


  나에게는 김판례, 라는 이름의 친할머니만 기억에 있다. 외할머니는 사진첩 안에서 흐릿하게 나를 업고 있는 채로 등장할 뿐이다. 친할머니는 호락호락 하지 않은 성품으로 웃는 낯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혹은 떠올릴 수가 없다. 아흔 살까지 사셨는데, 아파트 노인정으로 출근하는 할머니를 내가 모셨다. 서울이 낯선 할머니는 노인정에서 하루종일 화투판을 구경했고, 저녁이면 또 나나 동생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사는 것은 연필처럼 제 몸을 깎아내는 일이었다. 나는 조금씩 줄어드는 몸피를 보면서 나를 스쳐간 시간을 절감했다. 이제 볼펜 몸통에 의지하던 몽당연필처럼 내 삶도 소멸하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다시 연필로 편지를 쓰고 싶다. 연필 세 자루를 정성 들여 깎아서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나의 연필로 쓰인 문자가 구부리고 펼치고 넘어지며 마침내 날아올라 결승結繩이 되어 그대를 묶게 되기를. 다음 생을 넘어 다다음 생까지 나의 문자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햇빛 유리가 어떻게 내 눈을 찔렀는지 당신이 나의 하루를 알아주기를.” (pp.278~279)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실린 이야기들이 재미있어 속수무책으로 끝까지 읽었다. 가족이라는 굴레, 라고 여겨지는 상황들이 등장하는데도 무겁게만 읽히지 않는다. 핏줄이라는 환경은 바뀔 리가 없고, 어차피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마냥 끌려가지는 않겠어, 라는 심정이었을까.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고 요령껏 스스로를 독려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도달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의미 충만한 지점을 확인한 느낌이다.



김미옥 / 미오기傳 : 활자 곰국 끓이는 여자 / 이유출판 / 279쪽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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