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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19. 2024

성석제 《믜리도 괴리도 업시》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고자 하는 주관적이며 객관적이려는 소설가의 시선..

  「블랙박스」

  내가 없는 동안 카메라에 잡히는 너, 라는 것이 있다. 블랙박스에 잡힌 네가 나를 사로잡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블랙박스의 교체를 위하여 들른 곳에서 시작된 어떤 인연, 그러니까 너와 나의 인연은 어떤 지경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글감이 떨어진 소설가인 나, 그리고 무수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 너, 사이의 긴장감은 어떻게 고조되고 또 어떻게 소멸되고 말 것인가...


  「먼지의 시간」

  신비한 능력을 지닌 치유자의 역할을 하는 M 그리고 그 M에게 의지하는 아내, 그리고 그러한 아내와 함께 M을 방문하는 남편 I, 그리고 I의 후배인 Q... 그렇게 우리가 M을 찾아가서 보내는 하룻밤의 이야기이다. 한줌 먼지와도 같은 인간들 그러한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위계,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비하고 정신적인 위계를 이용한 일련의 사업 감각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야겠다.


  「매달리다」

  어째서 그는 나무에 매달리는 것으로, 그렇게 매달려 있는 상태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건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일까. 무당의 아들로 태어나고 북쪽으로 끌려간 배에 올라탔다가 이후 고초를 당하게 되고 결혼을 하여 아들을 두었으나 그 아들과 어렵사리 한 번 만나게 되었을 뿐인 그는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골짜기의 백합」

  역마살에 도화살이 겹친 것으로 보이는 나는 지금 카지노의 도시에서 밥을 팔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내게는 여동생 선녀가 있다. 선녀는 나와 달라서 모든 이의 시선을 끌만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밖으로 돌며 몸과 마음을 팔아 선녀에게 경제적인 윤택함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나도 실패하였고 선녀도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이 자매는 식당에서 밥을 팔고 있다, 이냉의 마지막에 다다른 이들에게...


  「믜리도 괴리도 업시」

  ‘믜리도 괴리도 업시’라는 말은 고려가요 ‘청산별곡’에 나오는 문구이다.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다. 소설은 소설집의 첫 번째 소설인 <블랙박스>처럼 이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같은 동네에서 시작되어 길게 인용되고 있는 듯한 너와 나의 오랜 인연을 기록하고 있다. 


  「사냥꾼의 지도」

  연극제에 참여하기 위하여 아비뇽에 머물고 있는 나는 자전거를 빌려 매일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어딘지를 알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어렵사리 자전거를 빌리고 또 구글 지도 혹은 그곳 사람의 말을 따라 짧은 자전거 여행을 다닌다. “관광과 여행, 모험은 뭐가 다를까. 대상의 거죽을 스쳐지나는 것과 거죽 속의 속살을 들여댜보는 것, 그리고 자신의 거죽을 열고 세포 속이 에너지를 대상과 뒤섞는 것의 차이? 결국 여행을 하고 모험을 겪고 나면 그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거지.” (p.218)


  「몰두」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이 억만 권, 옛날에는 십만을 억만이라고 했다. 그 정도는 될 거다. 그 많은 책을 읽고 그중 십분의 일정도만 가리고 뽑아 모은 것은 바로 지금 내게 물어본 그런 궁극의 책을 찾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규명하게 해주는 책의 결정판, 즉 단 한 권의 책을 ‘이피터미 Epitome’라고 하지. 자, 이 방에 있는 책을 모두 네 손과 내 손을 거쳤다. 너는 이 책들 중에서 진정한 이피터미가 어떤 책인지 알겠느냐?” (pp.237~238) 거대한 책더미를 정리하는 일을 내게 시켰던 외삼촌은 정리가 끝난 후 내게 ‘궁극의 책’을 찾아보라고 한다. 그 책을 찾는다면 그 방의 모든 것은 넘겨주겠다고 한다. 나는 엄두가 나지 않지만 질문은 유혹적이다. 하지만 외삼촌에게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죽는다. 내가 해답을 찾더라도 그것의 정담 유무를 체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너다」

  어쩌면 종종 이인칭 시점을 사용하는 자신의 새로운 작법 스타일의 연유에 대한 고백 같은 것일까. N분의 1로 살아가고 있는 나, 는 결국 N분의 1로 살아가고 이는 너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의 터득에 대한 고백일까. 무수히 많은 통계 자료의 숫자들, 그리고 그 숫자들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하고 있는 소설가의 객관적이지만 주관적인 어떤 시선... 



성석제 / 믜리도 괴리도 업시 / 문학동네 / 281쪽 / 20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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