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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오경철 《아무튼, 헌책》

새책이 헌책이 되는 동안 유지되어 온 책과의 유대...

  서점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조금 있지만 헌책방이라면... 잠실의 주공아파트 1단지 종합상가에 있던, 이제는 이름을 잊은 자그마한 서점을 나는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 누나가 내게 책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어느 주말 책을 돌려주러 갔을 때 누나의 여동생을 만났고, 나와 같은 학년인 그녀와 내 인생 최초의 데이트를 했다. 단성사 아니면 서울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잘들 살고 있는지? 아직도 가끔 헌책방을 찾고 헌책을 읽는지? 어느덧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어 이제는 어렴풋한 친구들 얼굴이 떠오를 때면 영영 답을 듣지 못한 줄 알면서도 남세스레 물어보곤 한다. 보고 싶어서겠지. 무언가를 같이, 미친 듯 좋아했던 사람들. 슬픔도, 상처도 청춘의 하위 장르였을 뿐인, 짧지만 찬란했던 그들과의 낭만주의 시대.” (p.46)


  대학 시절에는 학교 앞의 사회과학 서점인 이어도를 다녔다. 선배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였고 그렇게 남긴 돈으로 이어도에서 시집을 샀다. 2,700원이던가 아니면 3,000원이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의 시집을 한 권 살 수 있었다. 정현종이나 정희성, 황동규나 황지우 등의 시집을 읽었다. 장정일이 저자로 되어 있는, 지금의 독립 출판물과 같은 책을 샀던 기억이 난다. 소설이 한 편 실려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라나라 최초의 퀴어 문학이 아니었을까 싶다.


  “... 헌책방의 서가 앞에서 서성거릴 때 나는 현재에 거의 관심이 없다. 지나가버린 것, 오래된 것,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각별하고 애틋한 것들만이 내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헌책방에서 어쩌다 발견하는 ’이름이 쓰여 있는 책들‘ 또한 그런 것들이다. ’헌책방은 시간이 떠난 서점이다.‘ (부르크하르트, 《책에 바침》 중 재인용) 나는 자주 헌책방에서 시간을 잊는다...” (p.77) 


  본격적으로 아르바이를 하며서부터는 동대문의 어느 골목에 있는 도매 서점에서 열 권 혹은 열 다섯 권씩 책을 샀다. 계간지와 소설을 주로 샀는데 정가에 비하여 30퍼센트 정도 싸게 살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수요(나의 책을 읽는 속도)에 비하여 공급(내가 책을 사는 속도)이 부족하였지만 이때부터는 대부분 공급이 수요를 앞섰다. 책장 채워지는 속도가 꽤나 빨라졌다.


  “책의 정말 중요한 기능은 전시되는 것이다. 꽂혀 있는 것. 왕궁의 근위병들처럼, 놀이동산의 꽃시계처럼, 책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히 기능하고 있다. 전시!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며 숨겨진 (핵심) 기능이다. 대부분의 책은 자신의 전 생애를 책꽂이에서 보내고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의연하다.” (pp.117~118, 김영하의 《포스트잇》 중 재인용)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 한 차례 빅뱅이 일어났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을 백으로 치면 아내는 오십 정도의 책을 가지고 있었고, 이중 삼십 정도의 책을 나의 책들과 결혼시켰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라는 책도 있다.) 당시에 아내와 내가 함께 가지고 있는 책이 많아서―아내와 나는 문학회 선후배이고 합평회 및 세미나를 함께 한 사이이다―집에 놀러오는 이들에게 책 선물을 많이 했다.


  “책은 금세 잊힌다. 오래된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책조차 잠시 기억해둘 틈도주지 않은 채 금세 잊히고 만다. 그리고 잊힌 책들은 흩어진다. 우리가 잘 알거나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들로. 어딘가에 정착한 책들은 곧 수면에 빠진다. 그것은 죽음과 비슷한 잠이다.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데 때로는 안타깝게도 아예 깨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잊힌 책들이 흘러드는 세계에서는 그다지 특별한 것 없는 일이다. 한편 잊힌 책들 중 일부는 방랑자처럼, 뜨내기처럼 이곳저곳을 떠돌기도 한다. 이러한 유전(流轉) 또한 세상에서 금전을 매개로 거래되는 수많은 재화들이 시장의 뒷골목에서 맞이하는 대수롭지 않은 운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많은 책들이 그 내재적 가치를 잃고 그저 재생을 위한 종이 뭉치로 전락하여 고유의 형태를 잃어버릴 때까지 이러한 숙명을 감내한다. (pp.163~164)


  그렇게 지금도 인터넷 서점에서 새책을 사고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헌책방의 씨앗 회원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우리 집 근처로 이사온 헌책방을 확인한 후에 그곳에 들렀고 회원에 가입하였다. 자주 가서 살펴보지는 못하것이라 짐작했지만(그리고 짐작처럼 회원 가입 후 재방문을 하지 못했다) 동네에 하나쯤 그러한 헌책방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회원은 유지하고 있다. 헌책방도 유지되고 있는 것 같고... 



오경철 / 아무튼, 헌책 : 책에 남은 흔적들의 우주 / 제철소 / 207쪽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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