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슨 베이커 《페르마타》

에로틱하고 포르노그래피스러운 그리고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시간 (멈춤의)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 《페르마타》는 세상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능력을 지닌 한 남자 아놀드 스트라인 (아노라고 불리우길 좋아하는)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 능력을 페르마타 혹은 포울드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 서른 다섯 살이고, 임시직 타이피스트로 일한다. 가장 최근에는 로디라는 여인과 사귀었으나 지금은 헤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여인 조이스를 유심히 그리고 샅샅이(?) 지켜보는 중이다. 물론 시간을 멈춰 놓은 채로...


“... 포울드 안에 들어가는 것은 주변의 세계가 정지하거나 중지된 반면 나 자신은 생기를 느끼며, 보행을 하며, 사고를 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가변적인 길이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p.9)


소설을 읽다가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영화 속의 한 장면, 그러니까 주인공이 서커스를 구경하던 중 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러니까 한 순간 사랑에 빠지면서 곧바로 시간이 멈추게 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춰 있는 서커스 공연장을 가로질러, 허공에서 흩날리다가 그대로 멈춘 팝콘을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여인에게 접근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영화가 개봉된 것이 2003년이고, 영화의 원작 소설은 1998년에, 소설 <페르마타>는 1994년에 출간되었다.)


“확장된 시간 동안 여자를 정지시킨 후 다시 그녀가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다. 그녀로서는 내가 시간을 멈추기 이전의 어떤 순간보다도 그 내용에 있어 훨씬 풍부한 순간적인 시간이 경과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다. 그것은 마치 수백만분의 일 초라는 옅은 푸른색의 거대한 노르웨이 여객선이 막 항구에 닻을 내리고 건장한 관광객들이 그 배에서 내려 밀짚모자와 잡동사니를 산 다음 다시 배에 올라 프로펠러로 물을 둥글게 밀어내면서 출항을 해버린 것과 같다...” (p.141)


영화와 소설이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 속에서 시간의 멈춤 이후, 그러니까 다시 시간이 흐르는 순간 모든 것은 빠르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멈추게 만들었던 주인공의 시간과 주인공 바깥의 시간은 그렇게 다시 보조를 맞춘다. 하지만 소설 《페르마타》의 주인공인 아노의 시간은 시간의 멈춰짐과 상관없이 그대로 흐른다. 아노는 그렇게 멈춰진 시간만큼 더 산다. 소설의 제목인 ‘페르마타’는 늘임표라는 의미를 지닌 음악 기호인데, 그 기호가 붙은 음표는 더 길게 연주해야 하고 그 기호가 붙은 쉼표에서는 더 길게 쉬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어떤 잘못된 짓을 했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사전 계획하에 고통스럽게 한 적이 없다. 사실 나는 포울드의 도움으로 몇 명의 여자들이 중요한 판매부서 회의가 있기 전 때로 브래지어가 흘러내려 곤란해졌을 때 그것을 제 위치로 가게 해줘 그들이 사소한 창피를 당하는 것으로부터 구제를 해준 따위의 일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선의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정도의 선행이 어떤 만족스런 방어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p.33)


아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이 능력을 깨달았다. 그는 처음에는 아주 어려운 과정을 통해 포울드의 세계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라커 스위치나 고무밴드, 재봉바늘이나 손톱깎이 등을 이용하여 포울드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손을 튕기거나 안경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멈출 수 있다. 하지만 종종 별다른 이유 없이 그 능력은 사라지기도 한다.


“...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브래지어를 한 여자의 젖가슴은 아주 멋져 보일 거라는 얘기를 했다. 만약 그 여자의 가슴이 브래지어를 했을 때처럼 움직이지만 그 브래지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의 가슴은 반쯤 억제된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력이 제로 상태에서의 사물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다. 브래지어 속의 젖가슴은 브래지어의 탄력성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단단하게 붙들려 있겠지만 브래지어가 감싸고 있지 않은 젖가슴의 윗부분은 약간 흔들릴 것이다...” (pp.90~91)


소설은 포르노그래피의 상상력으로 시작되지만 그 진행이 포르노그래피를 그대로 닮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니콜슨 베이커의 또 다른 소설 《구두끈은, 왜?》를 끝까지 읽는 일은 꽤나 힘겨웠다. 작가는 구두끈이 풀린 사실 하나 만을 가지고, 한 회사원의 점심 시간 동안의 이동 경로만을 배경으로 하여 장편소설 한 권을 써내는 사람이다.) 멈춰진 시간의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여성의 알몸에 대하여) 에로틱하고 포르노그래피스럽게 그러나 동시에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꼼꼼히 적고 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강한 어조로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짓을 했으며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고 또한 어떤 해도 끼치지 않으며 선의로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각각의 여자들이 어떻게 보이며 그들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를 알고자 할 뿐이다. 나는 단지 낯선 사람의 갈비뼈가 내 손에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감상하기 위해, 혹은 내가 전에 쥐어본 적이 없는 털을 쥐어보기 위해 혹은 오르가슴 상태의 여자의 정지한 얼굴을 보기 위해 그럴 뿐이다. 그리고 페르마타 안에서 나는 그 여자를 수치스럽게 하거나 겁을 먹게 하거나 그녀가 하고 있는 일 혹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거나 하면서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몇 분 혹은 몇 시간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우주 전체를 정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산란시키지 않고서도, 내가 잘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p.169)


소설을 읽는 동안 꽤나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에 특히 도드라졌던 수많은 여성 혐오의 사건과 사고들, 그래서 드러난 혐오의 민낯과 관련된 발언들이 페이지를 넘기며 끄덕이는 내 목덜미를 자꾸 잡아챘다. 물론 지금 여기가 아니라 소설을 발표한 1994년의 미국에서도 소설의 설정과 진행이 논쟁적이었던 것 같다. 말미에 실린 작품 해설에는 작가의 아래와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소위 남녀간의 성별 전쟁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내게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에게 도전장을 던져 분노를 사려는 의도는 없었다. 내 소설은 재미를 지향하고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각과 생각에 관한 진실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불손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진실인 것이다... 내가 작가적 양심을 버렸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이다. 나는 늘 사랑받고 이해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자기 파괴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옹호한다. 이것을 써냈다는 사실이 기쁘다. 사실은 두려웠지만 아노의 강박관념과 호기심이 더 이상 허공을 떠다니지 않고 붙잡혀 정리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크게 안심이 된다... 일종의 자기 혁신이라고나 할까.” (p.302~303) - 작품 해설 중 (니콜슨 베이커의 말)


이런 소설이라면 지금과 같은 시기 다시 한 번 출간되면 어떨까 싶다. (현재 《페르마타》는 품절 상태이고, 중고로 구입해야 했다. 그나저나 이 말을 하고 있는 이때 하필이면 우리나라 최대 출판 도매상 중 하나인 송인의 부도 소식이 들려온다. 그 피해는 가깝게는 출판사로부터 멀게는 독자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 액자 소설이 등장하는 어떤 페이지에서 편집자에 의해 원작의 일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그때는 그 장면의 삽입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굉장히 많은 말들을 불러낼 수 있는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노의 (능력에 대한) 암시적인 자기 고백에 반기를 들고 아노를 떠난 로디의 태도보다 아노의 (능력에 대한) 고백과 실증 이후 그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조이스의 태도가 더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런 실토를 듣고 난 아내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남자들이란...) 뭐 그렇다는 이야기인데, 소설을 읽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리니...



니콜슨 베이커 Nicholson Baker / 정영문 역 / 페르마타 (The Fermata) / 문학세계사 / 303쪽 / 1995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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