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구획으로 나뉜 삶의 한 켠, 그 모서리에 포커스를 맞추어...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아버지의 옛 여인인 미스조 그리고 그녀가 키우던 17세 5개월이 된 거북이 그리고 내가 키우는 고양이 모양의 인형인 샥샥과 함께 살아가는 혹은 살아가게 될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거북이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느릿, 느릿, 느릿, 내가 선 곳과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다. 문득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제 나는 열일곱 살짜리 알다브라코끼리거북과, 고양이 모양 헝겊 인형을 가진 마흔 살 남자가 되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p.28) 영원에 가까운 거북의 시간과 아예 시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고양이 인형과 마흔 살이라는 현실적인 시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시간의 연대...
「아무것도 아닌 것」
“... 사고가 났는지 도로에 정체가 심했다. 누군가 울린 경적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운전자들이 너도나도 클랙슨을 눌러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소리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운전대에 엎드려 울 수도 없었다. 하늘이 유난히 새파랬다. 파란 빛깔의 돔형 지붕이 이 세계를 뚜껑처럼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뚜껑이었다.” (p.67) 그러니까 상황은 이렇다. 지원은 어느 날 고등학생 딸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아이는 꽤나 뱃속에서 큰 상태이다. 하지만 그 태아의 상태가 좋지는 않다. 남편은 해외로 출장 중이다. 딸아이의 태아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할 것도 나이 어린 학생이다. 그 학생 승현은 제 엄마인 미영에게 그 아이를 키워주면 되지 않냐고 말하고 미영은 그런 아이를 때린다. 아기는 태어났고 인큐베이터에 있지만 수술을 진행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 지영은 지금 계속해서 그 수술 결정을 미루고 있다.
「우리 안의 천사」
“... 조심하라는 외침 따위에 아랑곳 않고 남매는 계속 앞으로 달려 나아갔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그대로 바다에 빠져버릴 기세였다... 그릇 행군 물빛 같은 하늘에 뭉개진 구름 몇 점이 박혀 있었다. 한떼의 갈매기들이 낮게 날았다. 나와 아이들 사이에 50미터쯤의 거리가 있었다. 나는 멀리 선 채, 남매가 모래사장을 달리고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바다를 향해 돌진했다 멈추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p.95) 이것은 10년 후의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남우와 함께 동거를 하고, 남우가 이복형으로부터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의뢰와 함께 돈이 든 가방을 받고, 나와 남우가 아버지가 있는 건물에 침입하던 날로부터 10년이 지났고, 이제 나와 남우에게는 쌍둥이 남매가 있다.
「영영, 여름」
“... 해가 서서히 이울어갔다. K에서 몇 계절을 지나도록 이곳은 한여름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영 여름일 터였다...” (p.130) 한국인인 엄마와 일본인인 아버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나... 그렇게 세 식구는 일본을 떠나 K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나는 메이를 만나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된 바 노스 코리아, 그러니까 북쪽 출신의 아이였던 메이와 나 사이에 그 여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밤의 대관람차」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 장의 부고도 받게 될 것이다. 장이 양의 부고를 받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었다. 최후의 문장이 누구의 것이든 애도는 남아 있는 자의 의무였다.” (p.160) 원로 정치인 박의 부고 기사와 함께 시작되는, 정년을 십여 년 남겨 놓고 있는 여고 선생 양의 상념... 박과 양 사이에 있었던 일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렇다고 양의 현재는 박과 양의 과거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일까... 도드라지지 않는 이 물음들이 소설의 곳곳에 묻어 있다.
「서랍 속의 집」
“그 여자의 태연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이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p.179) 그러니까 전세값이 오르고 그 오른 전세값을 부담하거나 이사를 해야 하는, 이사를 한다면 동네를 바꾸거나 집의 평형을 바꿔 전세값에 맞추거나 아니면 집을 사거나... 끝없이 이어지는 이러한 이동의 행렬에 이제 발을 들이민 이 여인과 그 여인의 남편... 그리고 그렇게 고르고 고른 집에 숨겨진 쓰레기 더미와도 같은 사건 사고라니...
「안나」
오래전 댄스 동호회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는 안나, 그리고 그 안나를 나는 이제 8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가 다니는 영어 유치원에서였다. 스물 세 살의 안나는 어려웠고, 지금도 안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떠나나. 그리고 나의 아이는 그런 안나를 내게 말한다. 그녀가 자신을 지켜줬다고...
이제야 기억을 더듬어 각각의 단편 소설들에 리뷰를 달았다. 그 사이 파일을 열고 리뷰를 적어 넣는 일이 힘겨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었던 탓이다. 시간이 지나 나는 2016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의 이 시간을, 내 인생 전체를 이루고 있는 입체적인 퍼즐의 한 조각을 큐브처럼 꺼내어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소설집에 실려 있는 것은 삶을을 나름대로 구획 짓고, 그 구획의 구석에 포커스를 맞춘, 어떤 모서리들의 이야기 같다, 꽤나 어두운...
정이현 / 상냥한 폭력의 시대 / 문학과지성사 / 249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