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아우구스투스》

존재하는 기록과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의 매우 정교한 짜깁기...

by 우주에부는바람

*2016년 11월 12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스토너》에 심하게 빠져버렸던 탓에 존 윌리엄스의 새로운 소설을 진작 구매했다. 여차저차 읽기를 미루고 있던 참에 박근혜의 헌정 파괴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헬조선에서나 가능한 헬게이트, 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지 않겠나...) 저게 지도자냐, 저런 지도자가 운영하였던 그리고 아직도 운영하고 있는 이게 나라냐, 울분을 터뜨리느라 책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처음 집어든 것이 바로 존 윌리엄스의 《아우구스투스》였다.


로마의 첫 번째 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타리누스로 태어나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의 칼에 찔려 (물론 공화정을 수호하려던 다른 원로들의 칼과 함께) 죽은 이후에는 후계자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삼두(정치) 중의 한 사람으로 군사독재관 임페라토르가 되고, 이후 삼두의 나머지 두 사람을 무찌른 다음에는 결국 로마의 제1시민 ‘프린켑스’가 되었다가, 결국 존엄한 자 ‘아우구스투스’가 된 한 인물에 대한 책에 왜 덜컥 손이 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 자네한테서 도덕주의자의 냄새가 난다네. 내가 보기엔 도덕주의자야말로 가장 쓸모없고 경멸스러운 존재들이야. 쓸모없는 이유는 지식을 얻기보다 판단을 내리는 데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지. 단순히 판단은 쉽고 지식은 어렵기 때문에 말일세. 경멸스러운 까닭은 그들의 판단은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무지와 오만의 힘으로 세상에 강요하려 하기 때문이라네...” (pp.171~172) - 마에케나스의 말


어쩌면 그래도 한 번 박근혜를 하나의 지도자로 생각하고 그녀를 이해하는 하나의 반면교사로 저 옛날의 황제를 끌어내보자, 라는 마음의 수런거림이 있던 것인지 모르겠다. 기원전 40년대를 전후로 하여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한 인물의 일대기를 비스듬하게나마 이천년이 지난 지금 여기의 한 지도자에게 비춰보고자 한 것 같다. 물론 그것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안이한 이상주의자나 이기적인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네. 그랬다간 백발백중 실패했겠지. 재산과 권력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네. 개인의 안위를 넘어선 부는 지극히 천박하고 필요 이상의 권력은 비열하기 짝이 없으니까. 육십 년 전 그날 오후 아폴로니아에서 나를 사로잡은 건 운명이었네. 난 운명을 피하지 않기로 다짐했지... 하지만 세상을 바꿀 운명이라면 먼저 자신부터 변해야겠지. 그 사실을 이해한 것도 지식보다 거의 본능에 가까웠네. 운명에 복종한다? 그럼 무엇보다 자신과 타인, 심지어 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에 무관심할 수 있어야 하네. 자신의 내면에서 단호하고 은밀한 본성을 찾거나,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야 해. 물론 지금의 욕망은 물론, 개조하는 동안 발견하게 될 본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야 할 걸세.” (p.360) - 아우구스투스의 말


존 윌리엄스가 그려내고 있는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은 (사실 소설은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되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등장하는 것은 소설의 마지막 챕터에 들어선 이후다. 그 전까지는 주변 인물들이 나눈 편지글 혹은 일기글에 의지한다. 그것도 서기 전과 서기 후를 무시로 넘나들면서.)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과 입장이 있다. 그러니 아우구스투스를 지금의 박근혜와 등치시킬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소설 속의 율리아, 그러니까 아우구스투스의 딸이 작성한 ‘율리아의 일기’를 읽을 때 간혹 박근혜를 떠올렸다. 여러 기행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비호 아래 있다가 결국 그 아비의 쇠락 이후 로마로부터 추방당해야 했던 여인, 그러니까 원래 박근혜가 걸어야 했던 (그리고 다시금 정치계로 들어오기 전에 걷고 있었던) 길을 이천년쯤 앞서 걸었던 율리아가 있었다.


“... 우리가 결혼이라 부르는 세상은 속박의 세상이랍니다. 이따금 그런 생각도 들어요. 아무리 미천한 노예라도 우리 여자들보다 자유가 많다고 그래요.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p.240) - 옥타비아의 말


소설은 여러 면에서 훌륭하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에 비견할 만 하다. 그때 그 시절의 인물들을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존재하는 기록들과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상상을 이처럼 흔적 생기지 않게 짜깁기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천 년 전 그들이 나누었던 서한들에서 드러나는 고심의 흔적들이 지금 여기에서도 이토록 뚜렷하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 또 화가 나네, 박근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다만 무턱대고 이 소설을 권할 수는 없다. 소설이 다루고 있는 시기, 그러니까 로마의 최초의 황제가 만들어지는 이 시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이 많다. 정말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그 여섯 번째 권인 ‘팍스 로마나’ 정도를 먼저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에 이 시리즈 전체를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극우적 성향을 나중에야 알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 서술 방식이 너무 흥미 위주이고 작위적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이 두 가지가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다. 혹시 지금 그것들을 읽을 분들이라면 이를 염두에 읽는 것이 좋겠다.) 물론 위키백과에서 해당 시기와 해당 인물들을 훑어보는 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존 윌리엄스 / 조영학 역 / 아우구스투스 (Augustus) / 구픽 / 415쪽 / 2016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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