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김지승 《술래 바꾸기》

'사북'도 없이 페이지와 페이지를 무작위로 쓱삭쓱삭...

  이제 곧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게 될 것인데, 그 쓰기를 추동한 사건이 그전에 있었고, 나는 한이 맺힌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마구잡이로 읽기에 몰두하고 있다. 내용을 이해하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그저 활자를 집어 눈에 꽂고 있는데, 그것을 읽는다 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하다. 페이지의 삼분의 일을 한 번에 나머지 삼분의 이를 또 한 번에 읽기도 한다.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면 페이지가 넘어간다.


  “모든 여자는 딸이다. 딸들의 삶이 때로 모빌처럼 흔들리고 아름답게 그늘지는 걸 본다. 서류상으로는 혼자 아이를 키울 친구 옆에 나와 또 다른 딸들이 있다. 언제고 친구를 대신할 몸이 될 준비를 하면서 각자 아이 이름 짓기에 골몰하고 있는. 전화를 끊고 나는 우리 중 가장 작은 딸을 위한 모빌을 주문했다.” (p.34)


  작가의 책을 몇 번 읽었는데 작가의 성별을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문집엥 실린 글들이 대부분 여성에게 할당되어 있음을 책의 서두에서 이미 알게 되었지만 몇 차례나 왜 여자에 대해 쓰고 있지, 라고 갸웃거렸다. 무척이나 사적인 여성의 역사라고 보여지는 글들이 작지만 지치지도 않고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나는 지쳐갔는데, 지쳐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읽었다.


  “사북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했다. 사북이 잘 고정되어야 두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칠 뿐 서로를 베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니까 어떤 엄마와 딸은 사북을 잃거나 애초에 갖지 못한 가위의 양날이었던 건 아닐까. 결코 서로를 벨 수 없는 운명이 어긋나 버린 건 그들 탓이 아닐지도 몰랐다...” (p.60)


  가위의 두 칼날이 교차하는 지점에 끼워 넣는 물건을 ‘사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다만 우리집 가위는 사북이 없이 두 칼날 자체에 암짝과 수짝의 역할을 하는 모양을 미리 만들어놓아 그것들이 맞물리며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나는 책의 내용과 내용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작가가 만들어 놓은 ‘사북’을 모른 체 하고, 페이지와 페이지를 무작위로 건너 뛰었다.


  『... 나 포함 사우나실을 꽉 채운 여덟 명의 시선을 한 번에 집중시킨 모래시계의 권력자, 옥상집 형님이라 불리는 그가 모래시계를 뒤집자 무슨 큐 사인을 받은 것처럼 몸들이 차례차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가 어제 미미슈퍼 앓아누운 게 그 여자가 다녀가고 나서란 거잖아요, 형님?”

  웬만해서는 외면할 수 없는 도입부였다.』 (pp.66~67)


  나는 가부장제가 엄연히 존재하는 시기에 성장하였다. 대학에서 운동을 하고 있을 때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도 되었나 싶을 정도로 남성 중심주의 사고에 젖어 있었다. 공부의 일환으로 페미니즘을 들여다 보았지만 지극히 연구자의 마인드였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체로 읽고 떠들었다. 많은 시간 토의를 하였는데, 태도의 변화나 실천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토의를 위해서였다.


  “’보인다‘와 ’보이지 않는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활자가 익숙한 모양과 의미로 나를 안심시키다가 돌연 스르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 온다. 눈을 비비거나 깜빡여 봤자 안개는 걷히지 않는다. 눈을 감고 한동안 쓰지 않는 게 제일 빠른 회복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보이지 않을 때는 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쓰고 나면 명확해지는 느낌이지만 볼 수 없을 때 불안은 안개처럼 퍼지고 분노로 가장한 슬픔이 팽팽해진다. 그러다가 팽팽하게 당겨 잡고 있던 줄이 뚝 끊어지며 주저앉는 방식의 체념이 일어난다. ’보인다‘와 ’보이지 않는다‘ 사이에 불안과 체념이 놓인다...” (pp.151~152)


  그나마 크게 욕 먹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낸 것은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나의 말버릇 하나하나에 박혀 있는 남성 중심주의적인 요소를 어김없이 찾아내 퉁박을 주었다. 처음에는 반발도 하였지만 어느 순간 수긍한 채로 시간을 보냈고 지금은 예전의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아내는 최근 나의 보호자가 되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여하고 있다. 많은 것들이 다행이다.



김지승 / 술래바꾸기 / 낮은산 / 207쪽 / 2023

매거진의 이전글 한정현 《환승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