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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김민정 《읽을, 거리》

어려 시작된 읽을거리에 대한 갈망이 여기에 이르러...

  “읽을거리라 쉽게 뱉고 보니 / 읽을 만한 내용일 리 만무해 / 겁도 나고 부끄러움도 앞서 / 만만한 게 사이에 쉼표라고 / 둘 가운데 끼우고는 냅뒀다.” (p.9)

  - 어려서, 읽을거리에 대한 갈망이 심하였다. 이것저것 모든 읽을거리를 섭렵한 다음 다락방에 굴러다니는 의학백과사전을 읽었다. 그것이 왜 직업군인과 가정주부를 부모님으로 둔 우리집 다락방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선이 정교하지 않은 그림과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한 그것을 어쨌든 읽었다. 읽을거리였는지 볼거리였는지 모를 그 두꺼운 책으로 어린 성교육을 했다.


  “... 가입 이후 내가 남긴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그날그날마다 알아서 알려주니 그때마다 새록새록 추억에 젖어 사진도 저장하고 글도 복사할 수 있으니 그 재미의 쏠쏠함이 좀처럼 포기가 안 되는 것이다. 신박한 간소함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애초에 될 수 없으니 지지리 너저분함이나 즐기자 하고 클릭을 했더니만 어라, 일 년 전 오늘에 사진 하나가 크게 뜬다...” (p.92)

  - 페이스북에 과거의 그날이 뜨고는 한다. 이제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 용이와의 추억이 소환될 때면 가슴이 따끔하며 놀란다. 지금 키우고 있는 고양이 들녘의 어린 시절과 고양이 들풀의 아팠던 시절도 소환되곤 한다. 소환된 젊은 아내의 사진을 보노라면 이상한 서글픔으로 조용해진다. 다만 이렇게 불쑥 튀어나온 사진과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지금의 시간과 뒤섞어 공유하지는 않는다. 왠지 그러지를 못하겠다.


  “그해 늦봄, 암으로 세상을 뜬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고 온 지 며칠 안 되었던 친구가 교실 청소를 하려 창을 열며 중얼거렸던 말. 우리 엄마 어디로 갔을까. 일순 내 말문을 탁 막아버린 말. 빗자루질은 네가 해, 대걸레질은 내가 할게. 시방 깜깜해진 사방, 수돗가에서 대걸레를 비벼 빨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느릿느릿 교실 바닥을 쓸고 있던 친구 곁에 다가가자 새빨개진 눈으로 복받친 듯 내뱉던 말. 있잖아, 우리 엄마가 목구멍 안에 있어.” (p.113)

  - 고등학교 1학년, 첫만남의 와중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홀어머니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삽니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그 친구는 이율배반적인 자기 소개를 이어갔고 패러다임이 바뀌는 고등학교의 첫날에 우리는 뒤늦게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첫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자기 소개의 진위를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 ‘덕분’에 홀로 경주에 간 적이 있고 어떤 사람 ‘때문’에 홀로 경주에 간 적이 있다. 그렇게 홀로 경주를 다닌 것이 한 이십여 년 되는데,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경주에 살아서도 아니고 미워하는 사람이 경주에 살아서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사람만이 경주에 살아서인 듯싶다. 연연할 인연 없음의 하얀 맛은 어라나 건강한가. 터미널 근처 기사식당에서 막 데쳐 나온 두부 한 접시와 막걸리 한잔을 앞에 두고 쉬이 입에 대지 못할 적에 나의 설렘은 비단 허기에서 비롯된 들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p.176)

  - ‘어떤’이라고 호명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특히 ‘어떤’ 상황과 맞물리도록 글을 써야 할 때면 그들을 ‘어떤’ 장막 뒤로 감추고 싶어지곤 한다. 책에는 일기도 나오고 에세이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인터뷰도 나온다. 시인인 작가가 쓰는 일기나 에세이는 시는 아니지만 시를 많이 닮았다. 그에 비하면 인터뷰의 글들은 조금 아쉽다.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인터뷰이들이 시를 닮았다, 고나 할까...


  “가방을 바꿔 들 때마다 잊지 않고 아빠의 수첩을 옮겨 담는다. 그리고 간간 아빠 수첩에서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책처럼 읽는다. 김민정(〇〇〇동 〇〇〇호) : 010-〇〇〇〇-〇〇〇〇 (큰딸. 무지 바쁨. 귀찮게 자꾸 전화 걸지 말 것.) 수첩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다.” (pp.143~144)

  - 현재 부모님이 모두 요양병원에 계시다. 부모님의 집은 비어 있고 나는 아주 가끔만 들른다. 폭설이나 폭우가 지난 뒤에는 집안 이곳저곳을 살핀다. 지방의 조카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며칠 묵고 가기도 한다. 거실의 테이블 아니면 부엌 탁자 위에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수첩이 있다. 갑자기 찾아온 인지 저하의 초창기, 아버지는 자신의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불안감 속에서 그 수첩을 이용했다. 나는 그 수첩을 지금도 차마 읽을 수가 없다. 



김민정 / 읽을, 거리 / 난다 / 283쪽 /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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