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Jul 29. 2024

박연준 《듣는 사람》

읽고 쓰는 일이 듣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기를 희망...

  책의 시작에 붙어 있는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글쓰기는 공들여 말하기’이고 ‘읽기는 공들여 듣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공들여 듣기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그만 공들여 말하기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고 덧붙인다. 《듣는 사람》은 공들여 말하기를 업으로 삼은 작가 박연준이, 자신이 선택하고 싶었던 공들여 듣기 또한 허투루 하고 있지는 않다고 조금은 자랑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좋은 산문의 조건을 이렇게 꼽는다. 말하듯 자연스러울 것, 관념이나 분위기를 피우지 않고 구체적으로 쓸 것, 작가 고유의 색이 있을 것, 읽고 난 뒤 맛이 개운하고 그윽할 것. 『무서록』은 이 조건을 모두 갖추고도 다른 장점이 많다. 좋은 작가의 글이 그렇듯 소소한 소재로 뜻밖의 깊이를 끌어낸다. 고아한 문체를 뽐내지만 친근하다. 한자어와 고유어가 균형 있게 쓰인, 옛 어투를 읽는 재미가 있다. 인스턴트만 잔뜩 먹다 뚝배기 우렁된장에 쌈밥을 먹을 때처럼 흡족한 기분이 든다.” (pp.21~22)


  원래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책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장정일의 독서 일기 등에서 많은 책을 소개 받았다. 좋아하는 작가가 나름의 이유를 들어 소개하고 있는 책이고, 그것에 수긍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읽기를 따라 가고 싶어진다. 《듣는 사람》에서 첫 번째 책으로 소개가 되고 있는 이태준의 《무서록》도 그렇다. ‘우렁 된장에 쌈밥을 먹을 때’의 기분을 나 또한 느끼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슬프고 독특하다. 뒤라스는 사랑으로 ‘곤두선 슬픔’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가장 독창적인 작가다. 누구도 뒤라스처럼 쓸 수 없다. 그의 글에는 음악이 흐른다. 음악과 함께 심오함, 재치, 말라 비틀어진 시(건조하게 널어놓기에), 난해한 걸음걸이, 무엇보다 ‘조망의 시선’이 있다. ‘조망의 시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작가가 회상하는 대목을 쓸 때 마치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는 듯 쓸쓸히 관조하는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많은 일들을 겪고 ‘지쳐버린 신’처럼 이야기한다. 매혹적인 언술이다.” (p.91)


  《듣는 사람》에서는 모두 서른 아홉 권의 책이 소개되고 있다. 이제 알게 된 책도 있고, 이미 읽은 책도 있고,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도 있다. 어떤 책들은 작가만큼이나 나 또한 푹 빠져서 읽었고 자주 떠올린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존 윌리엄스 《스토너》와 같은 책들이 거기에 속한다.


  『“할머니는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보자 진했고 나긋나긋했으며, 낙관적이었다. 엄마들에게는 없는 삶을 관조하는 관록이 있었고, 엄마들에게는 있는 긴장과 호들갑이 할머니에겐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창밖에서 낳은 엄마다. 건너다보는 엄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아득해진다. 할머니는 늙고, 소피아는 자랄 것이다. 세상 곳곳에서.』 (p.172)


  읽기는 하였으나 작가만큼 감흥하지 못했거나 깊은 감응에 실패한 책들도 있다. 장자의 《장자》는 젊은 한 때 술을 깨는 용도로 아침 나절이면 밥상에 올려 놓고 읽고는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실패였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삼십세》는 젊다고 내세우기에 어색해지는 나이가 바로 삼십세, 라는 첫구절을 제외하면 남아 있지를 않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등학교 졸업 즈음에 끼고 다니던 장 그로니에의 《섬》도 있는데, 그저 쑥스럽다.


  “... 어릴 땐 요절이 근사해 보였으나 이제 안다. 누구라도 인생을 끝까지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 귀하다는 것. 자기 일을 오랜 시간 해왔을 뿐인데 어느새 폭삭 늙어버린 모습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삶, 이런 삶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비범’을 간직한 채 평범하게(혹은 평범해 보이게) 사는 일이 아닐까. 끊임없는 자기 수양과 다독임, 생을 향한 긍정 없이는 어려운 일을 테니까.” (p.238)


  자신이 공들여 듣고 그렇게 자신이 공들여 들은 것을 공들여 말하는 작가의 글을 공들여 듣고 있자니 이미 읽은 책들인데도 새롭다. 작가가 자신의 방식으로 공들여 들은 것처럼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공들여 듣고 싶어지기도 하였다. 읽고 쓴다고 하는 대신 듣고 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읽고 쓰는 일을 좀더 바짝 우리 곁으로 옮겨 놓았다. 읽고 쓰는 일을 사랑하여 읽고 쓰는 일이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기를 희망하는 작가가 보인다.



박연준 / 듣는 사람 / 난다 / 259쪽 / 2024



  ps. 책에 실린 책들은 아래와 같다.

  이태준 《무서록》, J.D.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박용래 《박용래 시전집》, 이상 《봉별기》,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 헬렌 니어링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다자이 오사무 《사양》,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장자 《장자》,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김소월 《진달래꽃》,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프랑수아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서정주 《화사집》, 김유정 《동백꽃》, 카프카 《변신》, 잉에보르크 바흐만 《삼십세》,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미셀 드 몽테뉴 《수상록》,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토베 얀손 《여름의 책》, 권정생 《빌뱅이 언덕》,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윌리엄 세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 나쓰메 소세기 외 25인 《슬픈 인간》, 장 그로니에 《섬》, 로맹 가리 《흰 개》, 존 윌리엄스 《스토너》,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매거진의 이전글 김민정 《읽을, 거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