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면서 유려한 소설의 문장들에 눈을 맡긴 채 생각은 이리저리...
타성에 젖어 습관처럼 살아간다, 라는 말을 싫어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타성, 그러니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문제는 그 방식이나 태도의 옳고 그름에 집중되는 것이 맞다. 그 타성의 수정 가능성이 가로막혀 있다거나 변화에 대한 유연한 반응이 부재하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비판받으면 된다. 매일 아침 직원들이 함께 자신이 그날 사용할 연필을 깎는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의 풍경이 그래서 내겐 의의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은 스테들러 루모그래프의 2H. H나 3H를 쓰는 사람도 있다. 설계 현장에 컴퓨터로 제도작업을 하는 CAD가 도입되는 것은 아직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제도용 까만 연필심지와 심지홀더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직도 연필로 제도하는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입사하자 선생님이 손수 내 이름이 새겨진 오피넬 폴딩나이프를 연필 깎는 데 쓰라며 주셨다. 짧아진 연필은 리라 홀더를 끼워 쓴다. 길이가 2센티미터 이하가 되면 매실주를 담는 큰 유리병에 넣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데, 병이 가득 차면 여름 별장으로 옮긴다. 쓸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난로 곁 선반에는 연필로 꽉 찬 유리병이 일곱 개나 늘어서 있다.“ (p.63)
소설을 읽으며 잡다한 생각들을 많이 했다. 화려한 치장 없이 단정하면서도 유려한 소설의 문장들은 각인의 노력을 조장하지 않고 잘 흘러간다. 독서는 온전히 그 흐름에 맡기고 생각은 이리저리 널을 뛴 것이다. 위의 연필 깎는 장면을 읽으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시절의 하수상함의 많은 부분, 그 원흉이 현재의 대통령이라 생각한다. 그 대통령을 지지하는 아버지에게 얼마 전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나아가 내게 아버지는 무엇인가,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그 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애정의 혜택을 받았는지 자문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 실례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위의 문장을 읽다가 우뚝 멈췄다. 어린 시절 아침에 일어나 아버지가 전날 깎아 놓은 연필이 가지런히 필통에 담겨 있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한 치의 각진 곳 없이 둥그스름한, 그리고 그 위로 아주 적당한 정도로 남겨진 연필 심지가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해체하면 똑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속 깊이 아쉽다고 생각한 일은 별로 없다. 해체되는 집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그 나름의 운명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391)
화자인 사카니시 도오루에게 사무소의 소장인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사무소의 여름 별장(이라고는 해도 산속에 위치한 여름 합숙용 사무소에 다름없지만)에서 보낸 사카니시의 한 계절이 이후 사카니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3년동안 신규 직원을 채용하지 않던 사무소에서 사카니시를 채용한 것도, 무리이가 자신의 조카와 사카니시의 결혼을 생각한 것도 알 수 없는 인연의 작용일 수도 있겠다 싶다.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p.106)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라는 건축가 무라이의 생각은 여름 별장에서 함께 보낸 이들인 이구치 씨, 가와라자키 씨, 고보야시 씨, 우치다 씨, 유키코 그리고 나 사카니시를 통해 전달될 것이다. 때때로 분화하기를 멈추지 않는 아사마 산이 바라다 보이는(책의 원제는 화산 기슭에서, 이다.) 그곳의 이야기는 그래서, 그들이 모두 그곳을 떠난 뒤에도 우리에게 남게 된다.
마쓰이에 마사시 / 김춘미 역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火山のふもとで) / 비채 / 431쪽 / 2016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