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른트 슐링크 《계단 위의 여자》

미스터리 구조 속에서 넓은 스펙트럼의 주제로 깊숙하게 향하는...

by 우주에부는바람

모든 이야기는 한 장의 그림에서 시작된다. <계단 위의 여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그림이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출장길, 아트갤러리에서 우연히 그 그림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오래전 자신이 한 기업가의 집 살롱에서 그 그림을 보았던 순간, 그와 동시에 그 그림 속 여인을 실제로 만났던 시절을 떠올린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소설 속의 그림 <계단 위의 여자>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에마, 계단 위의 나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래서 찾아보게 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말하는 순간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한 여자가 계단을 내려온다. 그녀의 오른발은 계단의 가장 아래 칸에 닿았고 왼발은 아직 위쪽에 있지만, 다음 걸음을 막 떼기 직전이다. 여자는 벌거벗었다. 그녀의 몸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음부의 털과 머리카락은 금발이며, 불빛을 받은 머리카락은 광채로 반짝인다. 창백하고, 금발인 나체의 여인은, 회녹색 배경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지는 계단과 벽을 등진 채, 무게감이 없이 가볍게 부유하는 몸짓으로 관람자를 향하고 있다. 반면에 그녀의 긴 다리와 둥글고 풍만한 엉덩이, 탱탱한 젖가슴에서는 관능적인 중량이 느껴진다.” (p.10)


그림의 주인공은 이레네라는 여인이고, 나는 젊은 법률가이던 시절 기업가인 군트라흐의 살롱에서 그 그림을 처음 봤다. 그리고 나는 얼마 후 슈빈트와 함께 그리고 다음에는 홀로 찾아온 이레네를 만났다. 군트라흐는 슈빈트에게 이레네의 초상을 맡겼고, 지금 이레네는 슈빈트의 애인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림은 군트라흐에게 넘어갔지만 그림 속 여인인 이레네는 슈빈트에게로 간 것이다.


“군트라흐에게 나는 젊고 아름다운 금발의 트로피였지. 트로피에서 가장 중요한 건 포장이고 말이야. 슈빈트에게 나는 영감이었어. 그런데 거기도 포장이 중요하더라고. 그리고 네가 온 거야. 여자에게 요구되는 세 번째 짜증나는 역할인 거지. 처음에는 암컷, 두 번째는 뮤즈,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자가 구출해주기를 기다리는, 위기에 빠진 공주. 왕자는 공주를 악당의 손아귀에서 빼내서 자신의 소유로 삼는 거야. 어쨌든 공주는 누군가의 손아귀에 들어 있어야만 하는 존재니까 말이야.” (p.131)


슈빈트는 처음에는 자신의 그림에 접근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음에는 그 그림을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내게 송사를 맡겼다. 군트라흐는 슈빈트의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그 또한 이레네를 돌려받기 위하여 나와 접촉한다. 그림과 그림 속의 여인,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기 위한 분란의 한 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 이레네를 가운데 둔 또 다른 축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내 늙음을 한탄하지 않는다.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청년들을 시기하지 않는다. 나는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이 부러운 이유라면, 지나온 과거가 짧기 때문이다. 젊은 날 우리는 과거를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다. 비록 매번 달라질지언정, 과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내 자리에서 과거를 뒤돌아보면, 무엇이 짐이었고 무엇이 축복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과연 성공이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는지, 여자들을 만나서 무엇이 충족되었는지, 무엇이 충족되지 않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p.78)


나는 탐정의 도움을 받아 지금 이레네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그곳을 찾아간다. 이레네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그리고 독일 통일 후에 이곳 오스트레일리아의 외딴 섬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이레네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살아왔고, 얼마 전 자신의 그림 아니 자신이 그려진 그림 <계단 위의 여자>를 갤러리에 전시하기로 했다. 그것은 일종의 미끼이기도 했다. 이레네는 그 그림의 전시를 통해 그 그림과 관련된 인물들이 자신을 찾기를 바랬다.


“아니면 그것들이 전부 작은 패배이기 때문에 우리가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새로 산 자동차에 최초로 생긴 흠집이 나중에 생긴 큰 흠집보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처럼 말이다. 몸에 박힌 작은 가시는 큰 가시보다 뽑기가 더 어렵다. 바늘로 아무리 쑤셔도 소용이 없고, 나중에 상처가 곪아서 저절로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른 시기에 겪은 커다란 패배는 우리 삶의 방향을 전환시킨다. 반면에 작은 패배는 당장의 변화를 유발하지는 않으나, 살아가는 내내 우리 곁에 머물면서 우리를 괴롭힌다. 살갗에 깊이 박혀 빠지지 않는 작은 가시처럼.” (pp.203~204)


그리고 이제 성공한 법률가인 나와 성공한 화가인 슈빈트, 성공한 기업가인 군트라흐가 차례대로 이 섬에 들른다. 오래전처럼 네 사람은 그림을 가운데 두고, 혹은 그 그림 속 여인인 이레네를 두고 다시 대치한다. 하지만 이제 그 의도는 명확하지 않다. 자신들이 찾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려 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호해졌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아무 의미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 내 아내는 자주 말하곤 했다. 선함의 반대는 악이 아니라 선한 의도라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악의 반대는 악한 의도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한 선함이다.” (p.54)


그림과 관련한 미스터리한 사건이 글의 초반부에서 우리를 깊숙이 끌어당긴다. 이후에는 각각의 인물이 지니는 개성이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청년기에서 노년기로 훌쩍 넘어가는 시간의 공백이 흘려보내듯 이야기하는 이레네의 인생역정으로 채워지는 것도 인상적이다. 이레네를 둘러싼 세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달려오는 동안, 이레네는 서독에서 정치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였고, 동독으로의 이주 후에 평온한 삶을 꾸렸으며, 독일 통일 후 오스트레일리아로 피한 후에는 이 외딴 섬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왔다.


“젊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느낌이에요. 틀어지고 어긋나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없다면, 한 번 일어나버린 일과 한 번 경험한 일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늙은 거예요...” (p.37)


이 소설을 정치적인 것으로 읽을지, 아니면 사회윤리적인 것으로 읽을지 이도 아니면 삶 혹은 늙음에 관한 관조적인 사색의 기술로 읽을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 읽어도 상관이 없도록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게는 사적인 욕망을 사회의 욕망과 결부시키고 이를 자기 내면 깊숙이 합리화해가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향한 엄숙한 조롱으로 읽힌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Bernhard Schlink / 배수아 역 / 계단 위의 여자 (Die Frau auf der Treppe) / 시공사 / 339쪽 / 201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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