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돌이켜 떠올려 보는 츤데레 할머니
나의 할머니는 1990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고 이틀 후가 추석날이었다. 나는 그날 학교 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고, 여느 때 같았다면 으레 밤늦도록 마셔야 했지만 그날은 예외적으로 일찍 술자리를 끝내고 귀가하였다. 집은 비어 있었고 병원 영안실로 오라는 쪽지만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나는 서둘러 쌍문동의 한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하시고 두어 달이 흐른 다음이었다.
“같이 산 지 아직 한 달이 조금 넘었지만, 이 할머니에게는 조금 박정한 구석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나자와에서 온 여자애들을 식객으로 받아 줬다지만, 지금은 과연 그들 중 몇 명이나 기억할까. 나 역시 그런 애들 중 한 사람으로 잊힐 거라 생각하니 왠지 허탈했다. 노인의 속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곧바로 뒤를 잇는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말로 애써 삼켜 버렸다.” (p.38)
소설 속의 할머니 긴코 씨를 읽고 있다가 이번 추석 성묘도 떠올렸다. 나는 할머니가 1901년생 그러니까 돌아가시던 해에 구십 살이라고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참 나이 계산하기 좋으시겠다, 1910년이라면 열 살, 1940년이라면 사십 살, 그리고 1990년이라면 구십 살이라니, 생각했다. 하지만 묘비에는 1902년생이라고 적혀 있었고, 일흔 여섯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1899년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환갑을 넘은 사촌 누이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여든아홉 살이었다고 하였다. 소설 속의 할머니 겐코 씨는 고작 일흔한 살이다.
“반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남장아이의 운동모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의 꽃 장식이 달린 머리 끈. 남몰래 동경했던 수학 선생님의 빨간 펜. 우편함에 잘못 꽂혀 있던 옆집 사람에게 온 우편 광고물. 구깃구깃 뭉쳐 둔 휴지를 펼치자, 짧은 머리칼이 나왔다. 요헤이의 머리카락이다... 상자에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것들은 해마다 빛이 바래 갔다. 저마다의 냄새를 잃어갔다. 나는 번했을까?” (p.103)
소설은 이제 막 스무살이 된 지즈가 도쿄에 혼자 살고 있는 친척 할머니 긴코 씨의 집에 기거하는 일 년여의 시간을 그려내고 있다. 지즈는 엄마가 중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따라가지 않았고 막연히 도쿄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상경했다. 프리터로 생활하면서 몇몇 남자와 사귀지만 끝이 좋지는 않다. 긴코 씨에게도 할아버지인 남자 친구가 생겼고, 두 사람의 연애는 지즈의 것과는 달리 계속 지속된다.
“최근에는 신발 상자 속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더 이상 나를 위로해 주지 못한다. 마음을 추억으로 되돌릴 뿐이다. 씁쓸하거나 달콤했던 기억을 나 홀로 즐기게 거들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상자를 버릴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의지해 왔기 때문이다. 신발 상자를 들고 흔들어 보니 안에 든 잡동사니들이 달그락달그락 메마른 소리를 냈다.” (pp.166~167)
엄마의 숙모인 일흔한 살의 긴코 할머니와 스무 살의 지즈는 그렇게 봄, 여름, 가을을 함께 보내고 겨울에 지즈는 그 집에서 나와 회사 기숙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나올 때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상자,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작은 것들을 훔쳐 숨겨 놓았던 신발 상자를 버린다. 지즈는 나이차가 불러일으키는 그리고 관계의 어색함이 건네는 긴장 속에서 일 년의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성장했다.
『“할머니, 세상 밖은 험난하겠죠? 나 같은 건 금세 뒤처지고 말겠죠?”
“세상에 안이고 밖이고 하는 건 없어. 이 세상은 하나뿐이야.”』 (p.169)
주의를 환기시키는 별다른 사건이 있는 소설이 아니다. 계절이 흐르듯 흘러가는 두 사람의 일상을 그저 조근조근 따라다니는 시선이 있을 뿐이다. 지즈의 성장에 긴코 할머니가 큰 역할을 했을 테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긴코 할머니는 요즘 말로 하자면 츤데레 할머니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할머니도 그랬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꽃게요, 라고 대답했는데, 내가 머물던 한 달여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이제 막 끓여낸 꽃게탕을 먹을 수 있었다. (할머니 댁은 부안, 변산반도 옆이었고, 당연히 냉장고는 없었고, 매일 새벽 할머니는 항구에 나가 꽃게를 사오셨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머니와 단둘이서 한 달을 지낸 적이 있다, 혼자 있기에 아주 좋았던...
아오야마 나나에 / 이영미 역 / 혼자 있기 좋은 날 (ひとり日和) / 예문사 / 223쪽 / 2015 (2010)
ps. 책에는 <출발>이라는 단편소설이 한 편 더 실려 있다. 회사를 그만두려는 남자, 같은 회사 동료이며 또한 회사를 그만둘 생각인 여자, 그리고 인간 입간판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린 처자 한 명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