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후의 숲과 고양이와 룰루랄라 벤치...
새벽 두 시가 넘었다. 어제의 날씨는, 애인이라면 어깻죽지를 때리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주 나빴어. 상상만 했는데 입으로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듣고 고양이 들녘이 무릎 위로 기어올랐다, 좋았어, 라고 말해주었다. 엉덩이를 두어 번 팡팡 두드려주자 골골골골 답해주었다. 새벽 두 시가 넘으면 이렇게 고양이와 대화를 나눈다. 검은 눈동자와 노란 자위를 가진 고양이의 눈과 친구가 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 한 두어 번 두루미와 내가 다투기도 하고 우리 둘과 새로 가까워진 친구들 때문에 오해가 생긴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고민 끝에 두루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서로 그날이 지나기 전에 사과했고 다음 날 생각했을 때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게 됐다. 막상 친구가 생기자 친구 같은 건 없어도 좋고 별로 안타까운 일도 아니라고 여겼던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p.49, <두루미와 나의 진짜 이야기> 중)
조경란의 『후후후의 숲』을 읽고 슬슬 뭔가 작성을 해볼까 하면서 <후후후의 숲>만을 다시 한 번 읽었다. 다섯 페이지짜리 짧은 소설이니 후후후, 날숨 몇 번 쉬다보면 모두 읽을 수 있다. ‘후후후의 숲’이라는 제목이 부드럽다. 자꾸 후후후, 후후후, 후후후, 리듬까지 살짝 붙여서 부르게 된다, 후후후, 그러자 고양이 들녘이 무릎에서 내려간다. 멀리 가지는 않는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으로 들녘이 배를 톡톡 건드릴 수 있다.
“봄이 왔습니다. 늘 약간의 슬픔이 따라다닙니다. 이맘때 넥타이 씨와 헤어져버렸기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그게 진짜 첫사랑은 아니었을 텐데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미연 씨는 묵묵히 젓가락을 집어듭니다. 어쩐지 모든 것이 엎질러진 물 같다는 기분이 드는군요.” (p.116, <첫사랑> 중)
사실 ‘후후후의 숲’ 같은 것이 내게도 있다. 나는 그것을 혹은 그곳을 ‘룰루랄라 벤치’라고 부른다. 나는 이십대 후반의 한동안 ‘룰루랄라 벤치’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울세관 사거리와 경복아파트 사거리 사이, 아미가 호텔 (지금은 임피리얼 팰리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앞에 그 벤치가 있었다. 나는 그 벤치에 앉아 해를 바라봤고, 비를 맞았고, 눈을 반겼으며, 구름을 셌다. 그러는 사이 고양이 들녘이 이 녀석, 무릎으로 다시 올라오다 담배를 피워 물자, 팽 돌아섰다.
『“선생님. 나이 들어서 좋은 게 있다면 어떤 거예요? 지혜가 는다는데요?”
“실수를 덜 하게 되는 것뿐이지. 지혜는 무슨 지혜.”
“그럼, 진짜 나이 들어가는 기분은 어떤 거예요?”
“내 차를 몰고 쌩쌩 달려가다 갑자기 이런 사인을 보게 되는 기분이랄까.”
“어떤 사인요?”
“넌 모르지.”
“뭔데요?”
“차로좁아짐.”』 (p.155, <차로 좁아짐> 중)
그리고 나는 룰루랄라 벤치에서 책을 읽었고 가끔 담배도 피웠다. 담배를 배우고 십여 년 정도가 흘렀을 즈음이니 아직 담배 맛도 잘 모를 때다. 그러니 대로변 호텔 앞 벤치에서 버젓이 담배를 물고 있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어쩌면 그 즈음 읽은 책이다. 아니 그보다 더 일찍 읽었을 수도 있고, 더 늦게 읽었을 수도 있다. 고양이 들녘이 희미해진 기억을 핀잔이라도 하듯 꼬리로 툭툭 정강이를 두들긴다.
『... 나는 그때 배트맨이 구해준 『사랑의 단상』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좋은 책은 나이가 들면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배트맨이 말했다.
책 읽는 것도 좋지만, 배트맨, 난 당신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럼 너는?
...
나는, 생각을 하죠.
맞아, 철수! 사람은 명상을 해야 해.
그런데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도 할 수 있어.
뭘요?
장소를 만드는 일.
장소?
그래. 네가 들고 있는 그 책에 쓰여 있잖아.
여긴 온통 사랑에 관한 말들뿐인데......
그거 없이 뭐가 가능한가?』 (pp.193~194, <시작이다> 중)
고양이 들녘이의 독려 속에 그 장소, 룰루랄라 벤치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온통 사랑에 관한 말들뿐인’ 책을 거기서 읽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온통 사랑에 관한 생각뿐인’ 내가 룰루랄라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앞부분보다는 뒷부분의 글들이 더 좋다, 물론 당신에게는 앞부분이 더 좋을 수도 있다. 한번 더 그건 그렇고 고양이 들녘이가 검은 눈동자와 노란 자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니야옹, 침대로 가자는 말이다. 우리는 친구처럼 한 침대에서 잔다.
조경란 / 후후후의 숲 / 스윙밴드 / 199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