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환상의 빛>

그녀의 알 수 없음과 같은 것이 때때로 우리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by 우주에부는바람

“당시 우리 가족은 아마가사키의 한신 국도 변에 있는 커다란 목조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약간 색다른 구조의 아파트로, 원래 길을 끼고 늘어서 있던 나가야 (칸을 막아서 여러 가구가 살 수 있도록 길게 만든 집) 위에 그대로 커다란 아파트를 올린 듯이 중축하여 하나의 건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안에 국도와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연결되어 있는 이상야릇한 건물이었습니다.” - 미야모토 테루, <환상의 빛> 중


함께 영화를 본 아내는 내게 책과 영화 중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한 다음 영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책을 읽을 때 도저히 떠올리기 힘든 묘사들이 있어서 답답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묘사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었고 그것이 나를 소설 보다는 영화 쪽에 손을 들어주도록 한 것 같다고...


사실 이렇게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설은 영화의 원전이고, 원전의 묘사가 없었다면 영화 속의 형상들도 없었을 것이니, 아무리 영화가 훌륭하다고 하여도 소설의 영향 아래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지나치지 않은가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저기 수평선에 맞춰 사람들이 그리고 조금 떨어져 주인공인 유미코가 검은 그림자인 채로 한참을 걸어가는 장면과 같은 부분에서는 이거 감독님이 영화로 소설을 쓰시네, 라고 혼잣말을 했던가...) 첫 번째 장편 극영화에서 감독이 기울였을 정성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와 함께 캐스팅된 배우들 또한 소설 속 캐릭터들과의 매칭도가 높아 보인다. 이유를 알수 없는 남편의 자살로 어린 아들과 함께 남겨진 유미코를 연기하는 에스미 마키코는 애매한 죽음을 간직하여 더욱 모호해진 캐릭터에 어울린다. 얼굴이 아니라 몸 전체로 연기하는 것 같다. (살펴보니 에스미 마키코는 <피스톨 오페라>에도 출연하였다.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움직임으로만 기억하고 있고...) 평온하기만 하던 일상생활 중에 문득 죽음을 향해 걸어간 남편 이쿠오는 아사노 타다노부가 연기했다. (내게 아사노 타다노부는 <이치 더 킬러>로 기억되기 시작하였다. 그건 그렇고 이런 역할도 할 수 있었구나 아사노 타다노부는...)



영화는 갑작스러운 죽음 혹은 그러한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 혹은 그러한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영화 속 이쿠오의 것과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미코가 있다. (소설 <환상의 빛>은 바로 이 유미코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주변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한 유미코는 그 남자가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된다. 재혼한 남자 타미오에게는 나이든 아버지가 있고 어린 딸이 있다. 그리고 유미코에게는 이쿠오와의 사이에 두었던 아들이 있다. 이들은 이제 가족이 되었고, 이들의 일상 또한 평화롭다. 조금은 거칠어 보이는 마을 주민들이 있고, 아름다운만큼 언제든 폭력적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의 풍광이 있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 이들 다섯 명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가 부른다고 그랬어. 아버지가 전에 배를 탔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 편에 예쁜 빛이 보인댔어. 빛이 깜빡 거리면서 당신을 끌어 당겼다는 거야. 누구나 그런 게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미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불안하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그 평화로운 순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직도 그 죽음의 연원을 알지 못한다. 그 알 수 없음이 좀처럼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현재의 남편 타미오가 들려주는 이야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답이 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없다, 그녀의 알 수 없음과 같은 것이 때때로 우리들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는 사실 말고는...



환상의 빛 (幻の光, Maborosi)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 에스미 마키코, 나이토 타카시, 아사노 타다노부 출연 / 109분 / 2016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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