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후퍼 감독 <대니쉬 걸>

이야기와 연출의 앙상블, 아이나와 게르다의 앙상블...

by 우주에부는바람

<대니쉬 걸>은 덴마크 코펜하겐의 풍경화가였던 릴리 엘베 (1882년 ~1932년) 본명은 아이나 베게너)와 그/그녀의 아내였던 게르다 괴틀립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릴리 엘베는 세계 최초로 현대적인 의미의 성전환 수술을 감행한 인물이었고, 아내였던 게르다 괴틀립은 그러한 그/그녀의 결정에 동의하고 끝까지 지지하였다. 두 사람은 덴마크 국왕에 의해 강제로 이혼하게 될 때가지 자매처럼 함께 생활하였다.


(강제 이혼 후 게르다는 이탈리아 외교관과 재혼하였고, 그와 함께 모로코로 갔으며, 그곳에서 릴리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릴리는 1931년부터 1932년 사이에 모두 다섯 차례의 성전환 수술을 감행하였다. 릴리는 다섯 번째 수술에서 드디어 온전한 의미의 여성이 될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50세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부작용으로 인해 그로부터 3개월 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데이비드 이버쇼프가 200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아이나와 게르다 두 사람 모두 화가였다. 아이나는 풍경화를 그렸고 (자연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이나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을 바꾸고자 하였다), 게르다는 인물화를 그렸다 (게르다는 아이나라는 인물에서 릴리라는 여성을 이끌어내는 단초의 역할을 하였다). 아이나에 비하여 게르다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림 자체의 탓일 수도 있고, 게르다가 여성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나는 시리 허스트버트의 《불타는 세계》를 읽는 중이었는데, 소설과 영화가 이루는 묘한 비대칭을 느껴야 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해리/해리엇과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나/릴리,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뉴욕 현대 미술계와 영화의 배경이 된 덴마크 혹은 프랑스의 미술계, 소설 속에서 해리를 대신하였던 여러 명의 미술가들과 영화 속에서 아이나를 그렸던 게르다까지...)


하지만 어느 날 게르다가 아이나를 그림 속으로 불러들이면서 게르다에게도 아이나에게도 하나의 변곡점이 생기게 된다. 아이나는 이제 게르다가 불러낸, 하지만 항상 그곳에 있었던 릴리의 존재를 실감하고, 더 이상 거부하지 않기로 한다. 주목을 받지 못하였던 게르다의 그림은 이제 아이나의 사촌(이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던)들 연작에서 릴리를 모델로 삼으며 이목을 끌게 되고, 미술계의 중심으로 입장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바뀌어버린 이들 두 사람의 관계를 그리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두 사람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과거의 사랑의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게르다는 아이나를 원하지만 아이나는 릴리로서 게르다를 사랑하는 것이고, 결국엔 게르다도 릴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두 연기자의 앙상블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에디 레드메인과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세비지 그레이스>의 에디 레드메인을 기억한다. <레미 제라블>의 에디 레드메인은 내게는 희미하다.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는 에디 레드메인을 두고 ‘얇은 창호지’ 같다고 하였는데, 맞는 말이다. 그의 피부는 언제 봐도 창백하다. 시선을 반사시킨다기 보다는 그대로 통과시킬 것만 같다. <엑스 마키나>의 알리시아 비칸데르도 기억한다. <제임스 본>의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희미하다. 그녀는 모호한데 그래서 집중하기에 좋다.)



실화 자체가 가지는 이야기의 힘이 워낙 큰 영화였고, 감독 톰 후퍼는 이러한 이야기의 힘에 짓눌리지 않았다. 이야기와 감독의 연출 또한 두 배우의 연기력만큼이나 좋은 앙상블을 이루었다고 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게 더 어려울 때도 있는 법이다. 실존은 그렇게 본질에 선행함을 영화가, 아이나의 이야기가, 아이나가 증명한다.



대니쉬 걸 (The Danish Girl) / 톰 후퍼 감독, 에디 레드메인, 알리시아 비칸데르 출연 / 119분 / 20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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