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니자끼 준이찌로오 《열쇠》

이례적인 관계를 근간으로 하여 차근차근 파국을 향하는 육체적인 관계...

by 우주에부는바람

소파에 드러누워 이 소설 《열쇠》를 읽고 있던 지난 주말 저녁, 아내는 소파에 기대어 스마트 폰을 조작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아내의 스마트 폰은 수신을 알리는 진동으로 자주 들썩거린다. 아내는 곧바로는 아니지만 수신에 응대하는 발신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책을 읽던 시선을 오른쪽으로 떨구기만 하면 아내의 스마트 폰을 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 나는 올해부터 이제까지 일기에 쓰길 주저하던 내용들도 과감하게 적어두기로 했다. 나는 나 자신의 성생활에 관한 것, 나와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히 쓰지 않았었다. 그것은 아내가 이 일기장을 몰래 읽고 화를 내지나 않을까 두려워서였지만, 올해부터는 읽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는 이 일기장이 서재의 어느 서랍에 들어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p.7)


소설은 나와 아내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는 일종의 심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쉰여섯 살의 남편은 대학교수이며 여전히 성관계에 관심이 많다. 일기에 따르면 마흔다섯 살의 조신한 아내는 성에 대해 고루한 태도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정념에 강한 여인이다. 그리고 나는 올해부터 일기에 과감하게 성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 작정이다. 소설은 육개월에 걸친 이 남자의 일기, 그리고 그 남자의 아내의 일기이다.


“... 나는 남편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도, 그 일기장을 작은 책상의 서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다는 것도, 그리고 그 열쇠를 때로는 서재의 책들 사이에, 때로는 마루의 융단 밑에 숨겨둔다는 것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아도 될 일과 알아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할 줄 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일기장이 있는 곳과 열쇠가 숨겨진 장소 뿐이나. 나는 일기장을 결코 펼쳐보거나 하지 않는다...” (p.14)


남편은 자신의 일기장을 엿볼 수 있도록 열쇠를 부러 떨어뜨려 놓는다. 어느 순간 아내가 참지 못하고 자신의 일기를 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남편은 딸인 토시꼬에게 소개시켜준 키무라 씨를 대하는 아내의 태도에서 작은 기미를 느끼고 이를 활용하기로 한다. 술에 취한 아내의 흐트러진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의 현상을 키무라 씨에게 맡긴다. 이제 남편의 질투심은 그를 성적으로 부추기고, 아내도 조금씩 그러한 부추김에 응한다.


“나는 아내를 음험한 여자라고 했지만, 그러는 나도 그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음험한 남자이다. 교활하고 음험한 남자와 여자 사이에 태어났으니 토시꼬가 음험한 딸이라는 사실도 이상할 건 없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음험한 존재가 키무라이다. 음험하기 짝이 없는 네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있다니 기가 막힌다. 그리고 세상에서 보기 드문 희한한 운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음험한 네 사람이 서로를 속여가면서도 힘을 합쳐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각자 서로 다른 생각이 있겠지만, 아내를 가능한 한 타락하도록 만들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점에서는 네 사람이 일치하고 있다......” (p.95)


1956년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외설 논쟁이 있었을 정도이지만 실제 성묘사가 파격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 성적인 관계의 비틀림은 지금 보아도 이례적이다. 남편으로부터 아내에게로 다시 아내에게서 남편에게로 이어지던 이 육체적이고도 심리적인 게임은 결국 남편이 관계 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남편이 쓰러지면서 멈춘 일기 대신 아내의 일기는 계속되고, 이제 우리는 그 일기를 통해 나와 아내의 관계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나와 키무라가 최후의 벽을 진짜로 허문 때는 솔직히 말하면 3월 25일이었다. 다음날인 26일 일기에 나와 키무라의 뻔한 문답이 적혀 있는데 그것은 남편을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중대한 결의를 한 것은 4월 상순인 4일, 5일, 6일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p.180)


길지 않은 소설을 모두 읽을 때까지도 아내의 발신은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자 아내도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서재를 겸한 큰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이어 데스크 탑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감각을 위해 특별히 구입한 키보드는 유난히 소리가 큰 편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 사용하는 데스크 탑에서도 아내가 작성한 문서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물론 아내도 그렇다.



타니자끼 준이찌로오 (다니자키 준이치로) / 이한정 역 / 열쇠 / 207쪽 / 2016 (1956)



ps. 책에는 소설의 내용과 연관된 판화 59점이 실려 있다. 소설이 1956년 <중앙공론>이라는 잡지에 연재될 때 함께 실린 무나까따 시꼬오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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