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예술이, 예술과 삶이 뒤섞이는 매우 독창적인 구조...
소설을 읽고 몇몇 지인과 후배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어서 이 책을 권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전화를 했다. 오랜만의 전화라 안부를 전하다 이제 막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만학의 기쁨(인지는 잘 모르겠다)을 누리는 중인 친구는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까페의 후배에게도 책 이야기를 했는데, 자영업자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후배는 책을 읽기 위한 시간을 내기가 힘겹다고 하였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일본 소설이라도 읽어보렴, 이사카 코타로가 좋을 것 같다, 이러다가 말았다.
『“망각은 기억만큼이나 중요한 삶의 일부일 거예요. 우리는 모두 기억상실증 환자죠.”
“그렇지만 우리가 잊었다면 말이예요.... 잊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는 건 아니니까, 잊었다는 걸 기억하는 건 잊는 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p.30)
어지간해서는 주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책을 권하지 않는다. 책은 자기가 알아서 읽는 것이 좋다, 고 여기는 편이다. 그렇지만 시리 허스트베트의 《내가 사랑했던 것》 과 같은 소설은 마구 권하고 싶어진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나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같은 책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어떤 이들에게 책을 권하면서, 책을 통해 스며든 감흥을 잠시 다시 꺼낸다. 그렇게 해서, 결국 잊고 말겠지만, 이 책의 여운을 한 번 더 복기하는 것이다.
“... 나이든 남자의 회상은 젊은이의 회상과 다르다. 마흔 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 일흔에 보면 의미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매 순간 우리를 폭격하는 찰나의 감각적 소재들로부터, 사물과 사람이 만드는 장면, 대화, 냄새, 그리고 촉감의 파편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대부분을 삭제하고 질서 비슷한 걸 부여한 모습으로 간직하고 살아가며, 그렇게 재조립된 기억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pp.172~173)
소설은 한 남자와 주변 인물들의 한 평생의 기록이다. 이 남자는 미술사가이며 미술평론가이다. 그의 아내 에리카는 영문학자이고 그는 어느 날 빌이라는 아티스트가 그린 자화상을 구입하여 거실에 걸어 놓았는데, 그 감흥이 실제로까지 이어져 빌과 평생에 걸친 친구가 된다. 빌의 그림의 모델은 바이올렛이었고, 당시 빌은 루실과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이후 루실과 헤어지고 바이올렛과 함께 하게 된다. 나와 에리카 그리고 빌과 루실(이후에는 바이올렛)은 심지어 한 아파트의 아래층과 위층에 살았다. 심지어 에리카와 루실은 비슷한 시기에 사내 아이를 낳았고, 매튜와 마크가 그들이다.
“에리카와 나는 둘 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친숙하고 달라진 바 하나 없는 의무적인 일들은 옛날의 삶을 이어간다기보다는 시늉만 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럿거스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한 시간쯤 되면 그녀의 몸짓이 무뚝뚝하고 기계적으로 변했다. 동료 교수와 통화할 때면 목소리가 마치 영화에서 패러디한 효율적인 비서의 전형처럼 들렸다. 결연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지만, 그 투사된 상像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보면 볼수록 더 추하게 보였다.” (p.202)
책은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번째 장의 도입부가 내겐 충격적이었다. 평화롭던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서술하는 방식이 너무도 직접적이고 간단명료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후 나와 에리카가 느끼는 상실감을 서술하는 과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아주 서서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독자인 나를 괴롭혔다.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든 슬픔의 구덩이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그들을 구덩이 바깥에서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저는 의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은데, 의미라는 게 이제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사실 아무도 의미에 신경 쓰지 않잖아요, 사실. 속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진들도, 광고, 헐리우드 영화, 여섯 시 뉴스, 그래요, 심지어 예술도 - 모든 게 결국 쇼핑으로 귀결되죠. 그런데 대체 쇼핑이 뭐죠? 걸어서 돌아다니다가 욕망하는 무언가가 나타나면 사는 겁니다. 어째서 사는 거죠? 왜냐하면 눈길을 끄니까요. 그렇지 못하면 다른 채널로 돌려버리죠. 그런데 어째서 눈길을 끌까요? 어쩐지 쾌감과 흥분을 주기 때문입니다. 반짜길 수도 있고 은은한 빛일 수도 있고 약간의 유혈이나 벌거벗은 엉덩이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쾌감이죠? 쾌감을 주는 무언가가 아니란 말이죠. 돌고 도는 겁니다. 다시 그 쾌감을 원하면 찾아 나서야죠. 달러 지폐들을 처박고 다시 산단 말입니다... 감각적인 예술은 잡지와 신문이 팔리게 하죠. 그리고 그 입소문이 그 수집가들을 데리고 오고, 수집가들이 돈을 들고 오고, 그렇게 돌고 또 도는 겁니다... 저는 피상적인 게 뭐가 그리 나쁜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사람들이 심오한 척 경건하게 허식을 떨면 그게 훨씬 기분이 나쁘던데요...” (pp.403~404)
세 번째 장으로 들어서면서 이제 이들에게는, 보다 직접적으로는 나와 빌과 바이올렛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나와 에리카의 슬픔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살피던 빌과 바이올렛, 이들의 아들 마크가 그 가운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불가해한 허언, 그리고 그러한 마크를 이용하고 있는 자일즈라는 설치 미술가가 보여주고 있는 세상의 인식 방식은 (자일즈가 예술 작업을 하기 때문에 결국 예술가의 세상 인식 방식이 되고 마는) 이제 이들을 새로운 수렁으로 빠져들도록 만든다.
평생에 걸쳐 진심을 담아 예술을 향한 길에 서 있었던 빌은 마크가 ‘체현’하는 ‘얄팍한 타협, 위선 그리고 비겁’이라는 형상 앞에서 무너진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대신 마크를 통하여 사랑을 구현하고자 했던 바이올렛 또한 ‘연민의 흉내’가 가능한, 그것을 ‘조절하고’ 심지어 ‘진짜로 공감하는 시늉’이 가능한 마크 앞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고, 또 세상을 떠난 빌을 대신하여 마크를 견뎌내는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다.
“... 해스보그에 대한 나의 편견을 감안하고 봐도, 그가 자일즈를 그토록 좋아하는 이유는 그 사내의 작품이 자기 목소리의 시각적 체현이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예술이나 예술가들에 대한 기사를 쓸 때 흔히 취하는, 잘난 척하고 냉소적이며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조 말이다. 그는 딱 자기처럼 글을 쓰는 - 덜 지적이지만 - 동료들을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미끈한 감언이설을 쓰는 문화 기자들 말이다. 그런 언어를 나는 지독하게 싫어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파악할 수 없는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만하게 암시하는 그 젠체하는 어휘들은 미스터리나 모호성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pp.286~287)
소설은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등장인물들은 나이가 들어간다. 그들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작품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이뤄낸 결과물로 인정을 받았고 자긍심을 가질 만 하다. 그것은 어쩌면 공적인 영역의 일이다. 그들의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면 어둠이 가득하다. 나와 에리카의 아들인 매튜는 십대에 생을 마감해야만 했고, 두 사람은 이후 함께 살 수 없다. 빌의 아들인 마크는 상상을 초월하는 캐릭터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소설은 이들을, 이들의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을 마구 뒤섞어 놓고 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을 찾기 위하여 여행을 하지만 동시에 예술의 어떤 어두운 힘과 싸워야만 한다. 그러한 어두움과 싸우면서 동시에 사랑하는 아들을 공유하는 아내와 편지를 교환하는 것도 멈춰서는 안 된다. 예술과 삶이 삶과 예술이 이런 식으로도 뒤섞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소설은 스스로 독창성을 획득하였다.
시리 허스트베트 Siri Hustbedt / 김선형 역 / 내가 사랑했던 것 (What I Loved) / 뮤진트리 / 519쪽 / 2013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