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못생긴 여자》

차별은 혐오를 낳고 혐오는 또다른 차별을 낳을 것이니...

by 우주에부는바람

《못생긴 여자》는 이탈리아의 소설로, 이탈리아에서는 신인들의 등용문과도 같은 이탈로 칼비노 상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들을 아주 좋아한다.) 작가인 미라아피아 벨라디아노는 1960년생이고 이것이 첫 번째 소설이다. (작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일간지와 잡지에 글을 쓰며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이 작가가 오십 살이 되어 쓴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은 ‘못생긴 여자’이다.


“나는 못생겼다. 진짜로 못생겼다... 그렇다고 불구는 아니어서 남들이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아니다. 내 몸에 붙어 있어야 할 것은 다 붙어 있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영락없이 어딘가는 기준치보다 조금 더 짧거나 길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는 건 의미도 없을뿐더러 부질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학이라도 저지르자는 심산으로 가끔은 거울 앞에 서서 내 몸을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p.6)


레베카는 태어날 때부터 못생긴 아기였다.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레베카의 어머니가 우울증에 빠질 정도로 못생겼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레베카의 엄마만큼 상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하여 이후 레베카가 겪게 될 상실감을 치유해줄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레베카는 자신의 외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못생기게 태어나는 것은 불치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될 뿐이다... 못생긴 여자아이의 삶은 긴장의 연속이다. 외모가 주는 혐오감 외에 또 다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p.59)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주변에 있던 몇몇 이들이 그녀를 도왔다. 집안일을 돌보는 마달레나는 어린 시절부터 레베카의 옆을 지켰다. 그녀가 학교에 갔을 때는 알베르니타 선생님이 있었고 전학생인 루칠라가 있었다.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레베카를 도왔던 것은 알리베르토 선생님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데 릴리스 할머니는 레베카가 모르고 있던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생이란 세월이 흐르는 것도 무시하고 간직하기만 해야 하는 귀중품이 아니야. 삶은 우리 손안에 망가진 채로 되돌아오기 일쑤야. 그리고 그걸 고칠 수 있는 부속품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은 그냥 부서진 채로 가지고 있어야 해. 어쩌면 없어진 걸 같이 만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삶이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우리 뒤에도, 위에도, 우리 안에도 있는 거야. 당신이 한쪽으로 물러서 있는다고 해서, 눈을 감는다고 해서,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해서 삶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우리와 다시 시작해. 우리가 여기 있잖아.” (p.197)


그녀의 어머니도 그리고 아버지도 소설의 끄트머리까지, 그녀가 나이가 드는 소설의 후반부까지도 그녀를 품지 않는다. 레베카가 들었어야 할 위의 문장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는 레베카 대신 아내를 위로하였다. 그나마 레베카에게 위로가 된 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이다. 그녀는 엄마가 죽은 이후 그녀의 일기장에서 ‘그 부드럽고 조그마한 다람쥐 다리로 그녀가 / 살며시 지나간다 / 하지만 내 침묵의 손길을 그녀는 느끼지 못한다’ 라는 문장을 발견한다. 레베카가 ‘사 년 이 개월 이십구 일’이 되던 날의 일기였다.


“... 미움이란 감정, 나한테는 익숙하지 않아. 미움은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 거야.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진 그저 희미할 뿐이야. 음악에 비유하자면 너무 잔잔해서 사라지듯이 끝나는 음악인 셈이지.” (p.247)


어쩌면 이 소설의 장점은 어쩌면 그녀가 당했을 고통을 적나라하게 적어내지 않는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당했던 일은 실루엣처럼 불투명하게 묘사된다. 명문가였던 아버지 가문의 어두운 구석에 대한 설명도 흐릿하다. 그런데 이러한 모호함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억울할법한 어두움에 대응하는 레베카의 소극성이 오히려 레베카가 당하는 모욕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듯싶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차별’이라는 말에서 두려움을 느껴왔다. 민족, 사회, 문화, 외모, 취향... 감히 누가 어느 한쪽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소설은 그 ‘두려움’에서 태어났다. 환영도 사랑도 못 받는 레베카는, 지금도 우리 안에 있다.”


책의 앞날개에 위와 같은 작가의 말이 있다. 소설을 읽으며 지난 주 강남역 인근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 사건과 뒤이은 애도의 포스트 잇, 들을 떠올렸다. 혐오 범죄이냐 아니냐를 두고 벌어지는 불필요한 논쟁도 떠올랐다. 지금의 애도가 비단 이번 사건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금수저와 흙수저로 나뉘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 따라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고(이것으로도 모자라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그 남쪽과 북쪽을 테남과 테북으로 나누나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일자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고,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고자 하고, 여혐과 남혐이 수시로 대립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언론은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않고, 그들은 분석과 조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차별이 혐오를 낳고 혐오는 또 다른 차별을 낳을 것이다. 차별을 없애는 사회가 아니라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세월호 사건이나 가습기 사태, 그리고 이번 살인 사건까지, 애도의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사회를 정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 Mariapia Veladiano / 윤병언 역 / 못생긴 여자 (La Vita Accanto) 비채 / 250쪽 / 201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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