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간한 무감각으로는 견딜 수 없는 불안하고 불온하고 불결한...
김이설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어지간히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소설을 읽으며 움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이설의 소설에 희망이나 화해 따위는 없다. 삶은 불안하기만 하고, 성은 불온하거나 불결하기만 하다. 하지만 작가의 이런 태도를 뭐라고 할 수 없다. 그 직시의 태도가 이 작가의 소설을 이끄는 힘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기도 힘들다. 그렇게 듣기 싫은 소리, 보기 싫은 장면으로 가득하다.
「미끼」
사내가 미끼를 던지고 여자들이 미끼를 무는 것은 아니다. 사내는 여자를 납치하고 그 여자가 미끼를 문 것이라고 우긴다. 이 우악스러운 소설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데에 생각이 가닿는다. 김이설 소설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횽포함은 편혜영이 즐겨 다루는 그로테스크와 또 다르다. 강에서 낚시를 하고 낚시 물품을 팔면서 생활하는 아버지와 그 아들, 그리고 그들의 창고에 붙잡혀 있는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고」
“아버지가 눈을 치켜떴다. 평생 교육자로 살았다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건 자기 논리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이혼과 재혼을 철저히 숨긴 걸 투철한 자기 관리인 양 내세웠다. 자신의 외도로 집을 나간 사람의 죽음 앞에서, 저렇게 서슬 퍼런 영정 사진 앞에서 밥술을 뜨는 사람이었다. 불운을 겪은 딸을 위해 이사하고, 국적을 바꾸겠다는 아들을 막지 못한 것도 자신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장본인이었다.” (p.64) 이런 아비를 둔 딸들이 (그리고 아들들도) 아직 많을 것이다. 그 화해는 결국 죽음 이후에나 혹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노약의 연후에나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폭염」
“유난히 이른 더위로 가뭄이 심했고, 봄 없는 긴 여름이 계속되었다. 철 이르게 피기 시작한 치자꽃이 한두 송이씩 폈다 지기를 반복했다. 매번 꽃잎 끝이 노랗게 타들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어 죽었다. 그래도 꽃냄새만큼은 변함이 없어서, 며칠 만에 집에 들어서면 온 집안에 달큼한 치자향이 고여 있곤 했다.” (p.104) 작가의 소설에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나 산과 들의 색과 모양이 분연한 가을은 어울리지 않는다. ‘폭염’이거나 ‘한파’가 적당하다. 이르게 남편을 잃고 키운 딸, 이 억척스럽지만 여전히 여자인 엄마와 그 엄마의 길을 답습할지도 모르는 딸의 삶은, 그 삶을 다루는 소설은 역동적이지만 신산하다, 끝까지...
「흉몽」
읽다보면 정말 나쁜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망가져버린 가정을 다시금 추켜세우기 위해 분발하던 아내와 남편이 시간이 흐른 후 포구 마을에서 만나게 되지만, (김이설은 김이설이어서) 그것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이것이 흉몽이라면 얼른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흉몽이다.
「한파 특보」
자식을 품는 황제 펭귄이 나오는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소설의 내용과 잘도 겹친다. 우리 아비들의 자식 거둠에는 동물적인 무엇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동물적인 무엇을 제대로 거둬내지 못한 채, 그저 동물적인 부성으로만 남아 있는 그 아비들에게 작가는 회피의 여유를 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들은 그러한 아비를 우회하고, 딸만이 그러한 아비과 맞닥뜨린다.
「비밀들」
“문을 닫기 전, 엄마가 잠시 머뭇거렸다. 같이 잘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는 오늘밤에 다 털어놔야 할지도 몰랐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도 없는 일인데, 당장은 입이 안 떨어질 것 같았다.” (p.180) 요즘 시골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소설을 보고 있자면 그 변태된 시골의 모습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시골에도 도시에도, 엄마와 딸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마을 사람들 사이에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도 비밀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 비밀들은 몽땅 추레한데, 그 와중에도 (비록 이식된 모양을 취하지만) 아이는 태어나고 자란다.
「복기」
윤철과 정미, 정미는 사라졌고 윤철은 그런 정미를 떠올린다. 결혼하기 직전 사고를 당하여 한쪽 발을 절어야 했던 정미와 그런 정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윤철... 그러나 정미는 그전에 한번 들른 적이 있는 시골의 하천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모든 이들의 삶에 깃들어 있는 후미진 기억들, 그 기억들을 제때 정화시키지 못할 때, 우리는 무슨 일들을 겪게 되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제목이 던지는 이율배반이 섬뜩하다. 이탤릭체로 소설의 중간중간 끼어드는 현재진행형의 어떤 행위가 섬찟하다. 파업으로 직장을 잃고 거기에 더해 감당할 수 없는 손해배상 청구금을 떠안은 사내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내는 남겨진 두 아들과 생을 꾸려가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에게 희망은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사실 그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빈집」
“소파에 앉아 둘러본 새 아파트는, 흡사 인테리어 잡지책에서 막 오려낸 사진처럼 말끔하고 정갈해 보였다. 수정은 그 순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면 바로 이 순간에 느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완벽한 그림이 아닐까? 다른 여자들도 이런 순간이면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수정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p.126) 새 아파트에 입주한 젊은 주부, 아직 아이를 갖기 전인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 갖게 되는 심리를 그려냈다. 우리 내부에 있는 흔하디 흔한 욕망과 그 욕망의 허위성에 대해 지극히 일반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이설 / 오늘처럼 고요히 / 문학동네 / 345쪽 / 2016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