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윤성희 《베개를 베다》

잊었다가 떠올리고 떠올렸다가 이내 또 잊고 그러면서...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 안에 많은 가족들이 등장한다. 할머니, 고모, 언니, 동생들이다. 여성이 좀더 많지만 남성들도 있다. 때때로 어떤 소설과 소설은 겹치고 헷갈린다. 오래 기억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우리들 삶도 마찬가지여서 당시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잊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또 어느 순간, 잊힌 줄 알았던 그 삶의 한 토막이 문득 떠올라서, 한동안 나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할 것이다.


「가볍게 하는 말」

“... 나는 수연에게 고모는 세상에서 목련꽃 풍선을 가장 잘 불던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고모는 내게 목련꽃으로 풍선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나는 열 개를 불어 하나를 겨우 만들까 말까 했다... 그런데 우리 고모는 말이야. 열 개를 불면 아홉 개는 풍선이 되었지. 너네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야...” (p.29) 어떤 사람은 가족들에게 이렇게 기억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쁘지 않게 생각되었다. 짧은 소설이지만 많은 가족이 등장한다. 고모와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와 그들의 자식들과 그 자식의 자식들까지 등장한다.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가족 구성원의 많음이 오히려 소설 읽기를 방해하는 것만 같다. 물론 그들로 인해 고모가 오롯해지는 구석도 있기는 하지만...


「못생겼다고 말해줘」

“... 어머니가 외삼촌에게 말했다. 넌 효자였잖니. 난 불효녀였고. 그러니 자식들이 거꾸로 된 거야. 균형을 맞추려고. 그렇게 말하고는 어머니가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덧붙였다. 비결이 하나 있긴 해. 쟤들 어렸을 때 난 질문을 자주 하지 않았어. 난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왜 그리 유치한 질문을 자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더라고. 좋아? 사랑해? 이런 걸 안 물었더니 알아서 크던데...” (pp.43~44) 쌍둥이 자매의 동생 쪽만이 남았다. 해외의 언니는 죽었고 남은 나는 엄마와 만나 밥을 먹거나 대화를 한다. 엄마는 전깃줄과 거기에 앉은 새를 악보처럼 본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해 전깃줄과 거기에 앉은 새를 찍어 악보를 만든다.


「날씨 이야기」

“... 아, 너구나. 니가 있다는 걸 깜박했어... 언니는 싱크대 앞에 서서 밥을 먹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서 잠시 유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어찌나 나랑 비슷한지 내가 죽었는 줄 알았다. 얘...” (p.71) 나이든 자매, 언니가 혼자 있는 아파트에 동생이 찾아간다. 그 집은 자매가 살았던 집이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 그곳에는 이제 나이든 언니만이 남아 있다. 별다른 것 없는 일상에 깃들어 있는 세월을, 동기간인 그들은 잘도 포착해낸다. 아니 어느 한 쪽은 포착하고, 다른 한 쪽은 포착당한다고 해야 하나...


「휴가」

201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는 수상작이기도 하다... 휴가 기간 무작정 집에서 쉴 생각을 하는 나를 박과 박의 아내, 그리고 두 아이가 찾아온다. 그들의 여행에 억지로 동반을 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은 어정쩡한 나의 휴가 여행은 시작된다. 별다른 큰 이야기는 없다. 그저 일상에 소소히 박혀 있는 이야기들을 손톱 끝으로 하나씩 캐내는 것만 같다. 시시하다면 시시하고, 소중하자면 소중하달 수 있을...


「베개를 베다」

“나는 장롱을 뒤져 베개를 찾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세제 냄새가 났다. 베갯잇을 벗겨보니 침을 얼룩진 자국들이 보였다. 그제야 내 베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를 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받아쓰기를 할 때 나는 아들에게 종종 그 문제를 내곤 했다. 아들은 꼭 베개를 배다, 라고 썼다. 나는 거실에 누워 베개를 베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잠이 왔다. 마법의 주문처럼...” (p.122) 헤어진 아내는 헤어진 남편에게 자신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을 맡아달라고 한다. 헤어진 남편은 헤어진 아내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장롱에서 자신의 옛 베개를 찾는다. 아내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남편은 엑스타를 하고 있다.


「팔 길이만큼의 세계」

“그는 서른둘에 결혼해서 서른아홉에 이혼을 했다. 아이는 없었다. 아들의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어머니는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울었다. 그리고 <칠갑산>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관광버스 안에 있던 하객들이 어머니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가 이혼을 알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식당 문을 닫고 주방에 앉아 혼자 막걸리를 마셨다. 그리고 또 <칠갑산>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p.149) 이혼을 한 나와 아내의 관계가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이혼을 한 나와 나의 어머니의 관계가 중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관계의 무게라는 것에 등급을 매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했다. 모든 관계는 병렬인 것이 낫다, 라고 읊조렸다.


「낮술」

“... 내 나이 되면 뭐가 제일 무서운지 알아? 계단이야, 계단. 할머니가 말했다. 그날 아빠의 머릿속에는 하루종일 할머니의 말이 맴돌았다. 나도 언젠가는 계단이 무서운 나이가 될까? 아빠는 밤새 뒤척였다. 그리고 새벽에 짐을 쌌다. 엄마의 앞에 나타난 아빠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무릎 연골이 닳을 때까지 살아보자고. 나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는 서로 부축해가며 계단을 내려가보자고...” (p.167) 여러 가지 낮술 장면이 등장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여러 낮술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위에서 나의 아빠는 젊은 엄마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사라졌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한 할머니와 낮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그렇게 엄마에게 돌아왔다. 낮술에는 때때로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나의 낮술에도 간간히 그런 힘이 끼어들고는 했으리라...


「모서리」

조와 친구인 나는 한 집에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언제나 스스럼없이 조는 나의 집으로 온다. 내가 혼자가 되었을 때 조는 그 상황을 반겼다. 그리고 나의 집이 있는 동네에는 문패를 달고 있는 집이 많은데, 그 문패들 중 하나의 이름은 조의 이름과 같다. 조와 나는 술을 마시고, 먼 길을 돌아 조의 이름과 같은 문패가 달린 집을 찾는다. 눈이 내리는 날이었고...


「다정한 핀잔」

나는 미희 언니와 아는 사이이고, 미희 언니에게는 미애라는 동생이 있고, 미애씨에게는 형욱이라는 아들이 있다. 나와 미애씨와 형욱이는 수술 중인 미희 언니를 기다리며 병원의 대기실에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사이 나의 미희 언니 사이에 있던 이런저런 일들이 소설에 끼어든다. 미희 언니는 겉으로는 쌀쌀 맞아 보이지만 속은 따듯한 사람임이 틀림 없다.


「이틀」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틀동안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다. 선배와 함께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새롭게 만든 회사였다. 얼마 전 그 선배는 죽었고 지금은 그 선배의 딸이 사장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나와 선배를 돕던 김비서가 자꾸 내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건다. 진짜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윤성희 / 베개를 베다 / 문학동네 / 273쪽 / 2016 (2016)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김이설 《오늘처럼 고요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