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이해하기 어려워'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한 한 철학도의...
저자명으로 되어 있는 저부제哲不解는 사실은 필명이며 본명은 장밍밍張明明 이다. ‘철학은 이해하기 어려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일종의 역설이다.) 저자인 저부제는 (1985년생이다) 중국 칭화 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치던 시기, 철학에 대해 어렵다고 푸념하는 이들에게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 책’을 쓰겠노라 농담한 것을 계기로 인터넷 게시판에 ‘12인의 철학자’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큰 인기를 얻어 이렇게 책으로 엮이게 되었다.
책은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역작은 아니다.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서양 철학사 전반을,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철학가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는 것 정도로 역할을 설정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책으로 김교빈, 이현구의 《동양절학 에세이》를 들 수 있겠다. 이들의 책은 동양의 철학자들을 중심에 놓고 그들의 철학에 적당히 재미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철학자 가운데 특정 성향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헤겔 같은 이는 학문과 인격 중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아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고, 한나 아렌트 같은 이들은 철학 연구에서는 왕언니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과시했지만 사랑 앞에서는 롤리타처럼 단순했다. 스피노자가 대표하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명리에 초연하고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했다.” (p.83)
책은 ‘본편’과 ‘번외편’으로 나뉘는데, 아마도 ‘본편’이 애초에 저자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12인의 철학자’라는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글일 것이다. 이 본편에서는 칸트, 헤겔, 마르크스, 한나 아렌트, 니체, 스피노자,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견유학파, 프로이트, 쇼펜하우어, 데카르트, 하이데거가 다뤄진다. 이와 함께 번외편에서는 볼테르와 루소, 비트겐슈타인, 러셀, 키르케고르, 마키아벨리, 에리히 프롬, 베이컨,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그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미셸 푸코가 등장한다.
『데카르트 덕분에 철학계는 인식론으로의 위대한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고대 철학자들은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에 몰두했고 중세 스콜라철학자들은 ‘유명론’과 ‘실재론’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데카르트에 이르러서야 철학자들은 중요한 것은 유명론의 ‘개별’과 실재론의 ‘보편’ 중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인간이 진정으로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느냐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곧 세상이라고 믿지만 나이를 먹고 시야가 넓어지면 학교에서 배운 것이 현실과는 다르며 때로는 눈이 자신을 속인다는 것을 앍 되고 어떻게 해야 세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과 같다.』 (pp.137~138)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를 전공으로 하였다는 이 젊은 철학가는 서양의 철학가들을 각 꼭지의 주인공으로 삼아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을 축약하는 데 일가견을 보이고 있다. 공인되어 있는 그들의 사상을 일반 독자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적절한 비유를 끌어들이는데, 아마도 작가의 글이 호평을 받은 데에는 이 비유들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대가라도 함부로 깡패짓을 해서는 안 된다. 일부일처제 monogamy 가 비록 학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더 합리적인 제도를 찾기 전에는 멋대로 절대 자유를 추구하고 전통에 반항해 문란한 애정 행각을 벌여서도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면 에이즈가 만연해 인류는 스스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p.97)
다만 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는 몇몇 부분들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서양철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전공으로 한다는데, 문득, 마르크스주의를 서양철학에 분류할 수 있는 것인지 헛갈린다.) 중국에서만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서양철학에 대한 중국 철학도의 써머리, 라고 생각하며 읽으면 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는 대중 철학서이다.
저부제 哲不解 / 허유영 역 /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 은둔형 외톨이 칸트에서 악의 꽃 미셸 푸코까지 26인의 철학자와 철학 이야기 / 시대의창 / 295쪽 / 2016 (2013)
ps. 몇몇 부분에 대한 발췌 내용을 옮겨 놓았다. 작가의 요약 방식을 살짝 엿볼 수 있도록...
“칸트 사상을 철학계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칸트 이전에는 인간의 관념이 반드시 대상에 부합해야 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천동설과 비슷하다. 하지만 칸트는 관념이 대상에 부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관념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는 인간 자신의 인지 조건에 따라 인식한 세계라는 칸트의 주장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과 닮아 있다.” (pp.22~23)
“... 사람들이 사회 발전의 규칙을 깨닫기 전에는 사회형태의 교체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규칙을 알고 나면 이 규칙을 이용해 자각적으로 사회의 형태를 교체시키게 된다.” (p.53)
“‘전체주의’는 역사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출현한 폭정이나 독재와는 다르다. 아렌트는 몽테스키외의 정체政體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해 이데올로기와 공포를 전체주의의 필수 요소로 제시했다. 전체주의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고도로 결합시켜 인간의 자유를 철저히 통제하고 인간에 대한 전면적인 통치를 실현한다. 폭정과 독재는 폭력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자유를 박탈하지만, 전체주의는 지속적인 운동, 즉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박탈한다. 이 운동 자체가 바로 전체주의다. 이것이 아렌트의 생각이었다.” (p.61)
『루소는 재능이 많은 인물이었지만 자기 연민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고집스럽고 의심이 많았다. 그는 한평생 분함, 억울함, 두려움에 짓눌려 살았다. 마치 자신의 슬픈 삶을 통해 《사회계약론》의 제일 첫 문장인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살아가는 동안 곳곳에서 족쇄가 채워진다”라는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p.165)
“... 지구가 멸망할 때 만약 단 한 권의 철학서만 가지고 탈출할 수 있다면 그 책은 선택의 여지없이 《국가》가 될 것이다. 《국가》는 철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윤리학, 정치철학, 형이상학, 교육학, 미학, 신학, 심리학 등 철학의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국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중세의 실재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 헤겔의 절대정신, 니체의 도덕적 계보, 루소의 자연 교육, 공상적 사회주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국가》 한 권만 있으면 지구가 멸망해도 인류는 이 책을 기초로 철학을 새롭게 싹 틔우고 새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