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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앳킨슨 《박물관의 뒤 풍경》

전면이 아니라 후면에서 발견되는 감탄스러운 요지경의 박물지...

by 우주에부는바람

소설을 읽을 분을 위하여 미리 알려드리자면, 책의 맨 뒷장에 있는 가계도를 참고하면 좋겠다. 아무런 자료도 없이, 언질도 없이 소설을 읽다보면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의 딸이고, 누가 누구의 어머니인지, 누가 누구의 자매이며, 누가 누구의 사촌인지 머릿속으로 그려내느라 진땀을 뺄 수 있다. 그러니까 소설은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다가 마를렌 고리스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이 떠올랐다)


“어, 내가 생긴다! 나는 현관 복도로 통하는 방의 벽난로 선반 위에 놓인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사이 배 속에 들어선다. 시계는 한때 (앨리스라는) 우리 증조할머니의 것이었다...” (p.13)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1951년의 어느 자정,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눈 정사 이후, 시계의 첫 번째 타종과 마지막 종소리 사이에서 나는 완성된다. 그러니까 이 일대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나, 루비가 드디어 잉태되는 순간으로부터 소설은 시작되는 것이다. 앨리스에서 그녀의 딸 넬에게로, 그리고 넬에게서 그녀의 딸 번티에게로 이어진 유전자는 드디어 번티의 딸 루비에게까지 이어진다. (물론 이 집안의 가계는 이 네 명을 줄기로 하고 있지만, 앨리스에게는 일곱 명의 자식이 있었고, 넬에게는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으며, 번티에게는 두 명 아니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나는 거의 일주일쯤 나이를 먹었고 아직 이름도 없지만, 적어도 번티는 이제 나에게 대강이나마 관심을 보인다. 비록 내게 전혀 말을 붙이지 않고, 내가 그녀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슬그머니 눈길을 돌려 나를 피하기는 해도. 나는 우리 어머니의 밖에 있기 때문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또 백일몽이라는 상상력 풍부한 그녀의 안쪽 세상에 더는 접근하지 못하기도 하고)...” (p.60)


착상 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일대기는 내가 두 딸을 낳고, 나의 어머니 번티가 죽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 소설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각각의 챕터에 딸린 주,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주,를 액자 형태로 가지고 있다. 소설 바깥의 주, 는 소설의 맨 마지막에 배치해 놓아는데, 이것은 불만스럽다. 주가 워낙 많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나름 두꺼운 소설의 뒤와 앞을 번갈아 오가는 일이 힘겹다) 이 주, 들은 내가 커나가는 현재로부터 꽤 오래 전으로 돌아가, 그곳 그 시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주, 들은 현재와 묘하게 맞물리기도 하고,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퍼트리샤가 요크 역 플랫폼 위에서 나를 껴안는다. “인생에서 과거는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거야, 루비.” 환생한 라마승 같은 미소를 띠고 퍼트리샤가 말한다. “말도 안 돼, 퍼트리샤.” 기차에 오르면서 내가 그녀에게 말한다. “과거는 함께 가져가는 거야.”』 (p.535)


박물관의 뒤 풍경, 이라는 제목 또한 의미심장하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혹은 1850년대부터 이어지는 소설 속의 디테일들은 미시적이다. 그러니까 거시적인 역사박물관의 전시물 목록에는 오르지 못할 수도 있는, 혹시 그곳에 있더라도 창고 한 켠에 방치되기 쉬운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물들과 상황들과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소설은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은 세대와 그 이후의 세대를 관통하면서도 박물관의 모습이 아니라 (주석에는 그 시대 상황을 밝혀주는 다종다양한 그러나 사소한 음식과 물건과 티비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박물지의 태도를 보여준다.


“... 넬은... 이다음에는 우리 할머니가 될 터이고, 어쩌다 보니 영문도 모른 채 살아온 인생이 또 고스란히 뒤로 남겨지게 될 터였다(시간 속에서 잊힐 또 한 명의 여인으로).” (p.51)


우리 사회의 큰 줄기가 커다란 사건들에서 영양분을 제공받는다고 느껴지지만, 그 가지 끝에서 피워내는 작은 꽃들은 거기서 거기의 모양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꽃 하나하나에 피고 지고 떨어져 사라지는 개별적인 또 하나의 우주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역사의 앞쪽이 아니라 역사의 그림자 쪽에 위치한 인들은 이 소설에서 보다 어엿한 주인공이 된다.


“『... 나는 순전히 부적절한 충동에 사로잡히며, 번티를 마구 흔들어 다시 살려내서는 처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진다. 다만 이번에는 더 좋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음, 이렇게 끝나고 말았네.” 퍼트리샤가 병원에서 우리를 태워가고 있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말한다. 요크가 택시 창문의 깜빡거리는 화면 속에서 빠르게 지나간다. “그거 알아, 루비? 사실 우린 어머니를 사랑했었어.”

“우리가? 나라면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도 사랑이야.” 이 말을 할 때 그녀가 우쭐대거나 감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지나 않은지 확인하려고 그녀의 얼굴을 살피지만, 그렇지 않다. 차라리 꽤나 곤혹스러운 듯이 보여서 그녀를 한 대 걷어차고 싶은 걸 참는다. 어쩌면 퍼트리샤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 하늘만큼 너른 - 나의 사랑에 대한 관념이 번티의 자폐적 모성까지 아우를 만큼 크지 못한지도 모르겠다.』 (pp.526~527)


작가의 소설을 향해 영국에서는 ‘곡예를 부리는 듯한 희비극’이라고 평가한다는데, 적당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계속해서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루비의 곁을 맴도는 언니의 실체, 넬의 언니 릴리언이 낳은 자식의 아비의 실체가 ‘곡예’를 부리고 있다고 한다면 이들 여인들 간의 마냥 미워하기도 그렇다고 사랑하기도 어려운 관계는 ‘비극’의 연원이 될 것이고, 그것들을 그려내면서도 절대 잃지 않는 작가의 유머러스한 태도는 ‘희극’의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물관의 전면이 아니라 그 후면에 은근히 도사리고 있는, 이면의 감탄스러운 요지경이 꽤나 볼만하다.



케이트 앳킨슨 Kate Atkinson / 이정미 역 / 박물관의 뒤 풍경 (Behind The Scenes At The Museum) / 현대문학 / 579쪽 / 2016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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