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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리라는 도시에서, 과거의 시간과 인물로부터 길어올리는 어떤 기억의 총합

by 우주에부는바람

기억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나는 중학교 일학년 초 (첫 번째 학교를 한 달도 다니지 않았다) 포천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한 적이 있다. 이사를 하고 얼마 뒤 포천의 친구들로부터 한 무더기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나를 잊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낯선 곳 용인에서 낯설기만 한 중학생으로서의 시작을 견뎌냈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흐른 뒤, 그때 그 시절 함께 중학교에 진학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도 중학생 노릇은 처음이었고, 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저 믿을 수 없는 기억이라도, 기억하고자 할 따름이다.


“... 또다른 기억이 살아났다. 하도 오랫동안 빛도 닿지 않는 저 심처에 파묻혀 있던 기억이다보니 마치 새것 같았다. 그는 그것이 정말로 기억인지, 아니면 마치 자유전자가 떨어져나오듯 과거에서 떨어져나와 이제 더는 과거에 속하지 않는 스냅숏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p.85)


그 친구들을 만난 뒤에 나는 그때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은 그 친구들이 아니라, 그때 다녔던 동네 교회에서 보낸 편지들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왜 그것을 교회에서 보내준 편지가 아니라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하고 중학교에 함께 진학한 친구들이 자의에 의해 보낸 것이라고, 동창들을 만난 그때까지 믿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와 함께 어째서 그 순간, 그것이 친구들의 편지가 아니라 교회에서 보낸 편지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도...


“... 너무 오래 고독하게 살다보면 - 다라간은 여름 들어 아무하고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니까 - 사람은 타인에 대해 의심도 많아지고 까다로워져서 그들을 오판할 우려가 커진다...” (p.24)


소설은 육십대인 소설가 장 다라간의 기억, 그가 떠올리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날 그가 잃어버린 수첩, 그것을 주운 한 남자로부터 그 수첩에 실린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에 대한 문의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모디아노 특유의 미스터리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라간의 시선에 의하면 의심스럽기 그지없는 사내 질 오톨리니, 그리고 그가 모르게 다라간에게 연락을 취해오는 샹탈 그리페까지, 독자들 또한 다라간처럼 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 젊었을 적에는 그냥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이런 유의 수수께끼에 사로잡혀 몇 날 며칠이 걸려도 끈덕지게 답을 구하곤 했다. 그것이 아무리 미소한 한 점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한 점을 전체와 결부하지 못하는 한, 버즐 조각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불안과 결핍을 느꼈다. 그것은 때로 어떤 문장이나 구절의 지은이를 찾는 일이기도 했고, 때로 그냥 한 이름이기도 했다...” (p.73)


하지만 소설은 예의 미스터리 소설로 귀결되지 않는다. 소설 속 세 가지 층위의 시간 그러니까 현재 육십대의 소설가 장 다라간이 시간과 스물 한 살 이제 막 한 편의 소설을 쓰는 청년 장 다라간의 시간 그리고 부모가 아니라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의문의 여인과 함께 생활하고 이는 어린 장 다라간의 시간이 마구 겹친다. 그리고 그 시간들 사이사이에 토르스텔, 뷔냥, 페랭 드 라라 등 많은 인물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 아니는 쪽지에 주소만 덜렁 쓴 것이 아니라 이런 말도 덧붙여 썼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그 큼직한 글씨는 구식 필체여서 생뢰라포레의 학교에서는 이미 쓰지 않는 것이었다.” (p.153)


소설은 일종의 미스터리한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이 (소설에는 파리를 둘러싼 많은 공간이 등장한다. 분명 의미가 있을 터인데, 파리라는 공간을 공유하지 못하는 이곳의 독자로서는 그것을 파악할 길이 없다.) 가지고 있는 미스터리에 대한, 작가의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쪽지에 대한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있었던 노작가의 소설로 치장된 회상일 수도 있겠다.



파트릭 모디아노 Patrick Modiano / 권수연 역 /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Pour que tu me te perdes pas dans le quartier) / 문학동네 / 179쪽 / 201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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